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76

|컬럼| 409. 개구리 비

다섯 살 좀 넘어 낙동강 근처에서 살 즈음 내 유일한 놀이터는 논두렁이었다. 종일토록 메뚜기를 잡으면서 놀던 시절. 어느 날 오후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소나기가 내린다. 그리고 하늘에서 미꾸라지들이 수도 없이 쏟아진다. 미꾸라지들이 줄줄이 땅에 떨어져서 꿈틀대거나 펄떡펄떡 공처럼 한동안 튀면서 굴러다녔다. 오래 전에 건성으로 보았던 1999년 영화 ‘Magnolia’에 다시 집중한다. 열명이 넘는 중요 등장인들이 서로 엮이고 얽히면서 복합적 테마를 펼친다. ‘magnolia, 목련’은 인간의 본능을 상징한다고 한 영화 해설자는 의미심장하게 풀이한다. 청소년 관람불가. 톰 크루즈가 여성공략법을 강연하는 세미나 주최자로 열연한다. 등장인물들의 아픔과 혼동, 부모 자식 사이의 갈등이 과거와 현재를 인정사정 없이..

|컬럼| 408. 군중심리

--- 혼자 있으면 교양 있는 사람일지라도 군중에 속하는 동안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야만인이 된다. – 귀스타브 르봉 1960년도 후기에 히피 문화(hippie culture)가 미국을 휩쓴 적이 있었다. 히피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면서 사랑과 평화를 외치며 전쟁반대 시위를 벌였다. 공동집단 생활(communal living)을 하고 프리 섹스와 혼음(混淫)을 일삼았다. 젊은 시절 열성파 히피였던 중년 백인 여자를 옛날에 진료한 적이 있다. 심한 우울증과 염세주의가 주요 증상이었다. 아버지를 모르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가 전혀 공부를 안 하는 통에 근처 ‘community college, 공동대학(?)’에 갈 것이라고 그녀는 씁쓸히 말했다. 아들은 가끔 아버지가 누군지 궁금하다며 알아 볼 방..

|컬럼| 406. 오늘 청소는 만점이요!

샤워하기를 싫어하는 병동환자들이 몇몇 있다. 이들은 몸을 오래동안 씻지 않는다. 어떤 때는 직원들이 덤벼들어 샤워장에 데리고 가 옷을 벗긴 후 물을 틀어줄 정도다. 그룹세션을 하는 중 ‘Cleanliness is next to godliness. - 청결하면 신(神) 옆에 간다’는 격언을 끄집어냈다. 매일 샤워를 하면 천국에 가느냐고 누가 비아냥거린다. 정작 샤워 안하기로 소문난 환자는 일부러 못들은 척한다. 만성질환 병동 간호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쓰는 전문용어로 ADL (Activities of Daily Living, 일상활동)이라는 말이 있다. ADL은 일상을 영위하는 기본적 기능 중에 먹기, 배설하기, 샤워 하기, 개인 위생, 옷 제대로 입기, 뜻대로 움직이기, 여섯 가지가 관건이다. 이중에서..

|컬럼| 91. 엣지있기

얼마 전 인터넷 에 들어갔더니 무슨 광고가 뜨면서 '옷을 엣지있게 입으세요'라는 자막이 눈길을 끌었다. 이것은 마치도 '엣지있다'가 문법적으로 일종의 형용사(形容詞)처럼 들렸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어리둥절할지 모르겠다. 물론 사람이 이럴 때 꼭 어리둥절해지라는 법은 없지만. 구글 검색을 해 보았더니 이 말은 'edge있다'는 식으로 영어와 우리말이 합쳐진 조합어인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말이 가능하다니. 사연인즉 한국 티브이 SBS에서 요사이 주말 연속 드라마 '스타일'에 나오는 배우 김혜수가 즐겨 쓰는 말에서 '엣지있다'는 신종 유행어가 생겼다는 것. 'edge'는 가장자리, 변두리, 모서리라는 뜻. 한국에서 팽배하는 반미주의 추세는 어디로 가고 우리는 이렇게 발음도 이상하게 말끝마다 ..

|컬럼| 405. The Food Is Terrible!

도널드는 젊었을 때 친척과 다툼 끝에 과실치사를 저지른 후 오래 동안 정신질환 치료를 받아왔다. 60대 중반. 그는 현재 내 병동에 머물고 있다. 정신분열증으로 인한 사고형식장애, ‘formal thought disorder’ 증상을 보이면서. 대화에 있어서 내용보다는 형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 말과 말의 연결고리가 전혀 없을 때 상대는 당황하기 마련이다. 누가 당신에게, “나는 겨울이 좋아. 도서관 닭고기는 맛이 없어!” 한다면 두 짧은 문장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어서 당신은 몹시 어리둥절할 것이다. 당신과 나는 생각과 생각 사이에 객관적인 연결이 있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철두철미한 언어의 자유는 있을 수 없다. 세련된 언어감각으로 초현실주의를 추구하는 현대시라면 혹시 모르지만. 전에 도널드는 병동에서 ..

|컬럼| 404. 실언이 싫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negative symptoms’를 생각한다. 무언, 무욕, 무관심, 무감각, 무감동, 무쾌감(無快感)처럼 온통 ‘없을 無’가 들어가는 증상들로 짜여진 정서상태다. 그런 ‘네거티브 증후군’으로 뒤범벅이 된 환자 여럿을 앞에 놓고 그룹세션을 진행한다. 그들은 묵묵무언. 나는 허허한 언어공간을 메꾸기 위하여 입놀림이 빨라진다. 주입식 대화가 일방적으로 펼쳐지는 월요일 오후. 시간의 속도가 느려진다. 그들의 눈빛을 살펴보며 알아차린다. 내가 하는 말을 그들이 얼추 다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분명히 인지(認知)하는 눈치다. 나는 확인하려고 애를 쓴다. “데이비드, 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대충 되풀이해서 말할 수 있겠니?” 그는 좀 생각 하다가 “약이요,” 하고..

|컬럼| 403. 아령의 흉터

맨해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2021년 11월 현재 전시중인 ‘Surrealism Beyond Borders’를 관람했다. ‘경계 없는 초현실주의’의 황홀한 시간! 프랑스 시인, 정신과의사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1986~1966)이 1924년에 선포한 ‘초현실주의 성명서’를 곱씹는다. 그의 폭탄 선언은 시(詩)에서 출발하여 모든 예술 분야에 걸쳐 전세계에 들불처럼 번졌다. 브르통은 당시 프로이트가 주창한 ‘무의식’과 그의 획기적인 논문 ‘꿈의 해석’에 큰 영향을 받았다 한다. 초현실과 꿈은 무의식의 텃밭에서 피어나는 의식의 꽃이다. 초현실의 뿌리에는 무의식이라는 본능이 도사리고 있다. 초현실에는 심리적 안전을 꾀하는 방어기전과 성적본능의 줄기와 잔가지들이 숨어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

|컬럼| 402. 꽃의 맛

옛날 정신과 수련의 시절에 어느 우울증 환자에게 “Keep your chin up! (턱을 치켜 드세요! - 힘 내세요!)”라 한 적이 있다. 그 퉁명스러운 60대 여자는 그런 말은 자기도 할 수 있다면서 발칵 화를 내면서 방을 나가버렸다. 낯이 뜨거웠다. 지도교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건 마치도 우울증 환자에게 우울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충고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가 말한다. 내과의사가 배가 아픈 환자에게 아프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싸가지 없는 말을 한 셈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행복하세요! 하는 싸구려 입버릇처럼.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다. 나중에 ‘will power, 의지력(意志力)’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입에 올렸다. 그게 뭔지 모른다며 설명을 해달라 해서, ‘will’은 의도(..

|컬럼| 400. 격(格)

병동 직원들과 성격(性格, personality)에 대하여 토론을 벌인다. 성격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결국, ‘한 사람의 특징적인 생각, 감정, 그리고 행동’을 일컫는 것이라는 짧은 결론을 내린다. 성격은 기분, 생각이나 태도로 남들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다. 그렇다. 성격은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인생사다. 나는 “Personality is everything!” 하며 힘주어 덧붙인다. 당신과 나의 모든 대인관계에서 사실 ‘성격이 전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종사하는 정치, 사회, 경제, 종교, 연예 등등 제반 분야에 걸쳐 똑같은 이론이 적용된다. 영어의 ‘personality, 성격’에 비하여 한자어로 인격(人格)이라는 말이 따로 있는데 사전은 ‘사람으로서의 품격’이라 풀이한다. 인품이..

|컬럼| 399. I'm Game, 오징어 게임!

2021년 9월 17일에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Squid Game)’이 넷플릭스에서 방영을 시작한지 보름 지난 10월 2일 현재 전세계 83개 국가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빚에 시달리는 삶에서 탈피하기 위한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살벌한 표정을 읽는다. 살기 위하여 상대를 패배시켜야 한다. 패배자들은 즉석에서 총살당한다. 생존은 약육강식의 법칙만 따르지는 않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민첩한 반사작용, ‘달고나(설탕 뽑기)’가 요구하는 창의력, ‘줄다리기’ 단체경기에 이길 수 있는 팀워크의 노하우, ‘구슬치기’ 게임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속임수의 발로, 등등. 아, 또 있다. ‘징검다리’ 게임에서 사람 몸 무게에 와스스 무너져 깨지는 약한 유리와 강력한 가공유리가 여기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