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좀 넘어 낙동강 근처에서 살 즈음 내 유일한 놀이터는 논두렁이었다. 종일토록 메뚜기를 잡으면서 놀던 시절. 어느 날 오후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소나기가 내린다. 그리고 하늘에서 미꾸라지들이 수도 없이 쏟아진다. 미꾸라지들이 줄줄이 땅에 떨어져서 꿈틀대거나 펄떡펄떡 공처럼 한동안 튀면서 굴러다녔다.
오래 전에 건성으로 보았던 1999년 영화 ‘Magnolia’에 다시 집중한다. 열명이 넘는 중요 등장인들이 서로 엮이고 얽히면서 복합적 테마를 펼친다. ‘magnolia, 목련’은 인간의 본능을 상징한다고 한 영화 해설자는 의미심장하게 풀이한다.
청소년 관람불가. 톰 크루즈가 여성공략법을 강연하는 세미나 주최자로 열연한다. 등장인물들의 아픔과 혼동, 부모 자식 사이의 갈등이 과거와 현재를 인정사정 없이 넘나든다.
짧은 대사가 귓전을 때린다. “우리는 과거를 끝냈는지 모르지만, 과거는 우리를 끝내지 않았다. - We may be through with the past, but the past ain’t through with us.” - 누군가 과거를 청산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새빨간 거짓말, 혹은 일방적이고 얼빠진 발언을 하는 것임을 몸서리치게 암시하는 발언이다. 윌리엄 포크너의 ‘수녀를 위한 진혼곡(1951)’에 나오는 명언,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는다.”와 똑같은 내막을 좀더 현대적 감각으로 피력하고 있다.
당신과 나는 과거의 노예다. 동물뇌라는 별명을 가진 우리의 중뇌(中腦) 속에 숨어있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본능이 생존 경력이 많이 딸리는 전뇌(前腦)의 파리한 지성보다 훨씬 더 우세하다 .
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딸을 성추행한 죄의식에 빠져 권총자살을 한다. 장학 퀴즈에 출연한 천재 소년이 돈만 아는 아버지의 압력에 염증을 느끼고 방영 도중에 밖으로 뛰쳐나간다. 톰 크루즈는 임종이 가까워진 아버지에게 그의 옛날 행동을 개탄하며 울면서 욕설을 퍼붓는다.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어처구니 없는 혼동에 빠지면서 그들 모두의 인생이 미치광스러운 상황으로 점철되는 순간, 순간, 순간들!
밑도 끝도 없이 개구리들이 떼거지로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내 어릴 적 낙동강 근처 논두렁 바닥으로 미꾸라지들이 떨어져 내릴 때와 똑같이 무섭고 경이로운 광경! 때를 같이하여 등장인물들의 아픔과 광증에 휴지부와 쉼표가 찍힌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우리가 지지고 볶고 목을 매는 순간들이 이런 돌발적인 일로 해소되고 종식되는 것이다. 당신과 나의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중압감이 현저히 감소되거나 아쉬움을 남기면서 사라지고야 만다.
구약성경 ‘출애급기’에 신이 이집트 왕을 벌 주기 위하여 나일강 개구리들로 이집트 땅을 뒤덮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현상을 현대 기상학은 물기둥이 회오리바람의 역학으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가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우리말로 ‘용(龍)오름’이라 하지.
대통령 선거로 한국이 술렁이는 2022년 3월 9일 나흘 전 3월 5일이 경칩(驚蟄)이다. 놀랄 驚, 숨을 蟄!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개구리가 봄기운에 화들짝 놀라 일순 몸을 숨기는 이율배반적 동물현상이다. 칼리포니아 어느 소도시 매그놀리아 스트리트를 운전하는 중 하늘에서 떨어지는 개구리 떼, 그리고 낙동강 근처 논두렁에서 미꾸라지 떼가 마구 쏟아지던 삶의 경악이다.
© 서 량 2022.02.21
-- 뉴욕 중앙일보 2022년 2월 23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2/02/22/society/opinion/202202221728565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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