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린 봄 / 황재광 비린 봄 황재광 사월의 길바닥에 누워있는 저 어린 벚꽃의 몸에는 젖 내음이 묻어있다 우유빛 비린내가 난다 실성한 어미 벚꽃나무 봉두난발 산발한 머리 흔들어 대고있다 하늘은 푸르고 푸르러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고 니가 죽고 내가 살고 내가 죽고 니가 살고* 절벽 위에 서 잇는 어미 벚꽃 진절머리 짧은 생 찢고 흔들어 날려 보낸다 베아트리체 눈물에 젖어 빛나는 눈 베아트리체여 *서정주 시 한 구절 빌려 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20.03.30
무제 / 황재광 무제 황재광 갈가마귀 빛 어둠 골목에서 발화한 은하수 빛 가로등 불빛아래 어떤 소리가 탈주한다 외마디 단말마 한쪽 다리가 짧은 남자가 목발로 곱사등이 아내를 타작하듯 후려치고 있다 알처럼 움츠린 그 아내는 그대로 알곡이어서 쭉정이가 날리지 않는다 머리 위로 들어올린 목발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9.10.26
말 없는 말 / 임의숙 말 없는 말 임의숙 푸른 씨앗 년년이 살아온 인연 꽃나비 해마다 찾아와도 종자로 남은 빈 쭉정이 오월, 가슴에 종양으로 파종하고. 삶이 한참 여물었다지만 마흔의 중반 즈음 떠난 씨앗은 비릿하다 그 후, 아버지는 작은오빠를 찾지 않는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12.19
그리움이 귓속에 살며 / 임의숙 그리움이 귓속에 살며 임의숙 물방울이 빗물방울이 아닌 물방울이 돌 돌 맴돌다 한 삼 일을 먹먹하게 함께 지내는 것이였다 물방울이 이슬방울이 아닌 물방울이 또르르 구르다 한 삼 일을 따각하게 함께 지내는 것이였다 물방울이 눈물방울이 아닌 물방울이 웅 웅 속삭이다가 한 삼 일을..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12.01
시골 별 / 임의숙 시골 별 임의숙 일 년에 두어 번 안부를 주고받는 일 중에는 할머니의 이 빠진 웃음처럼 보름날 허물어지던 흙담벼락 같은 상갓집 인절미 콩고물 묻은 슬픔은 슬프지 않게 나눠먹는 것 같은 소식 내가 등을 토닥여주는 일도 그대가 손을 잡아주는 일도 모두 멀리 있어 눈길이 닿는 하늘에..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11.14
S 에게. 2018.10.9. 발인 / 임의숙 S에게 2018. 10.9. 발인 임의숙 어머니 오시던 날은 아침에 까치가 날더라 집 옆 밤나무는 고요하게 굵은 제 살을 내놓더라 문 열어 마중 나오시던 어머니 굽은 허리에서 반기시더라. 호박넝쿨 억척으로 넘어서는 담벼락엔 노란꽃등이 걸렸더라 청솔의 무늬 자신에 양말에 너의 그리움으로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11.02
장마 / 임의숙 장마 임의숙 헐은 담장 밑으로 날씨가 고인다 탄저병에 앓아 누운 시름이 고랑에 떨어진다 물을 주는 일도 약을 치는 일도 뚝 끊긴 예상이란 때론 빛 좋은 개살구 같아서 짓무르는 고추밭 수위를 넘나드는 장맛비에 힘없이 낡아가는 아버지의 한숨 강아지 나 몰라라 호박잎 들춰낸 공으..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07.17
손 / 임의숙 손 임의숙 손을 펴면 한 잎의 잎새 허공에 외마디 안간힘 그 손을 잡아준 적이 있는지 손을 오무리면 하나의 그릇 허기지고 차가운 빈 공간 그 손을 채워준 적이 있는지 손을 꽉 쥐면 한 자루의 망치 뭉치고 굳어진 아픔 그 손을 감싸준 적이 있는지 손을 흔들었던 안녕 저 편에 홀로 남은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06.05
낙타 안에는 사막이 산다 / 황재광 낙타 안에는 사막이 산다 황재광 벌 한 마리가 장미 속으로 들어간다 꽃은 천국의 문 젖과 꿀이 흐르는 곳 에덴의 수호 천사 미카엘처럼 장미 향기 흩뿌리며 문밖으로 나온다 또 다른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다 낙타가 사막에 산다는 말은 재 진술해야한다 낙타 안에는 사막이 산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05.06
자목련 / 임의숙 자목련 임의숙 자주 떨리던 잠이 손이 부끄러워 뿌리는 더 깊게 앓고 있었나봅니다 빛이 잘 드는 마음을 따라 가면 잿빛 상처도 아무렇지 않고 바람이 잘 들게 마음을 열고 보면 비가 내려도 피식, 웃음 뿐 한 순간, 하늘의 기억으로 사라진다 해도 새소리 맗게 머무는 등을 달았습니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8.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