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의 詩모음 159

몸집, 꿈집, 얼음집 지나 / 김종란

몸집, 꿈집, 얼음집 지나 김종란 캄캄한 눈빛 오대산 상원사 들어가는 숲길에 물기 가득한 눈빛 소금강 첩첩 계곡 흐르는 폭포에 하지 못한 말 제주 드넓은 벌판 돌하르방 바람 숭숭 뚫린 얼굴에 다 놓아준다 땅 깊이 하늘 깊이 울리는 *노래 소리 *Handel: ‘Ombra mai fu’ 詩作 노트: 쉼, 쉼표, 느림 향유한 젊은 플라타너스 시간 느리게 노래한다 아슬아슬 생명 품에 안고 © 김종란 2023.09.06

슈베르트의 옆모습

슈베르트의 옆모습 김종란 비가 그친 후 여름 저녁 완만하다 숨을 고르는 빛나는 얼굴들 저녁 햇살 머무는 호박빛, 산호빛 맨해튼 마천루 음표 사이를 빠르게 걷는다 언어들이 음악이 되는 거울 비추듯 살아서 기쁜 미소들 현악 사중주 흐르듯 손을 잡는다 詩作 노트: 다른 노트의 소리 소리 색과 빛의 소리에 심취하며 그리워하는 목탄화 데생의 슈베르트 © 김종란 2023.08.09

한여름 그늘 문 / 김종란

한여름 그늘 문 김종란 뒤 안 푸른 잎들 귀 세우고 수런거리는 녹음의 빗장 살짝 흔들린다 둥근 안경테 속 피로한 여행자의 눈빛에 푸른 물 속 그늘 문 열린다 끝없이 마주 보며 지어지다 허물어지는 초록빛 기와집들 꿈의 물고기 그림자 낮게 춤추며 숨 빛으로 지어지다 흔들리는 토벽들, 깊게 솟구치며 낮게 속삭이듯 흐르는 한여름 물 속 이야기 한 구절, 한 구절 변화하는 초록의 채도, 흔들리는 빛의 추 예기치 않은 여행, 되씹고 뒤쫓으며 앞서며 낯설음, 낯익음 뒤섞이는 깊은 물길 묵묵한 해시계 곁 잠잠하게 빛나는 물빛 눈에 어룽지는 연하디 연한 속뜻 詩作 노트: 수국 몇 송이 환한 여름 빛 내려 앉는 초록의 꽃병, 그 곁을 지나는 검은 고양이, 여름은 순식간이다. © 김종란 2023.06.23

*빗방울 전주곡 / 김종란

*빗방울 전주곡 김종란 피아노 음 빗방울 툭툭 맺히듯 마음 텃밭에 숲에 번지며 목덜미에 스미는 음악의 온도 먼 발치에 숲 속의 노루인가 어느덧 시야를 가로막는 만개한 작약 반쯤 열린 외따른 방에서 유려한 오월이다 눈빛 푸르게 깊어지는 짙은 이끼 빛으로 빛을 반사하는 물 연못 들릴 듯 말 듯한 숨소리 짧은 여행을 떠나면서 기차안에서 펴보는 화려한 손수건 라일락 교보문고 앞의 라일락 김유정 문학관의 라일락 깃들고 싶다 초록의 불길과 소리 사물과 건물과 형제와 자매와 한 영혼인 듯 불현듯 가까웠던 이상과 김유정 향기만으로 깃들어 발등을 비추는 등불 문학의 꿈속을 지나며 초록의 불길과 번개가 겹치는 절벽과 파도와 먼 갈매기가 나르는 등대가 보이는 섬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 시작노트: 비를 머금은 바람, 흔들리는..

자몽향 / 김종란

자몽향 김종란 청파동 입구 흠, 흠 바람 따라 몸에 와 감기는 향기 수레에 그득한 자몽향 그 봄 처음 마신 시간의 향 흐릿한 주홍, 분홍 청파동 입구로 자몽이 날아가네 훨, 훨 봄 하늘 귀퉁이 당신의 비몽사몽 사랑 자몽이 야구공처럼 구름 속으로 날아가네 비 쏟아지는 먼 세상, 다른 세상에서 자몽(自懜)한 자몽향이 자꾸 곤두박질 치고 있어 엎치락뒤치락 향기가 번지고 있어 지금 내 입안에 머무는 자몽즙, 그 쓴 맛 창문을 거세게 때리는 빗줄기 속 © 김종란 2021.08.19

눈을 감다, 그리고 뜨다 / 김종란

눈을 감다, 그리고 뜨다 김종란 늦은 저녁 시장 통에서 국수를 사, 초롱에 넣고 걸어오면 벌떼처럼 붐비는 발자국 소리 100년 전, 어느 날 이국 원시의 향 머무는 해당화 꽃잎 틈 지쳐 잠든 도시의 꿀벌 해당화 울타리 넘어오는 물소리, 웃음소리 이른 아침 *East River 위로 선박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흐르는 시간 같아 천천히 움직이는데 어느새 멀리 가 있어 * Manhattan 섬 동쪽에서 흐르면서 Long Island 해협과 연결되는 강 © 김종란 2021.08.15

새벽 소리 / 김종란

새벽 소리 김종란 새벽 공기를 뚫고 아침으로 날아드는 새들의 떼창 속 깊은 악기 소리, 새벽은 내 영혼의 포도주 폐부를 적시는 맑은 바람을 타고 먼 옛날 음악시간 풍금 소리 들린다 분홍과 연두 빛이 오는 소리 검푸른 숲을 빠져나와 내게로 오는 아코디언 소리 은은히 들리네 열리는 듯 그러나 닫히는 듯 바람의 분량만큼 내 옷섶을 파고드네 © 김종란 2021.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