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76

|컬럼| 424. 우리는 왜 말을 하는가

일정한 토픽 없이 그룹 세션을 시작한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화제를 포착하려는 의도에서 자유연상으로 의식의 흐름을 도모한다. 정신분석이 추구하는 다이나믹한 기법.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누군가 밖의 날씨가 참 좋다고 말한다. 야, 이놈아! 가을이라서 그런 거야, 하며 다른 환자가 거들먹거린다. 말을 꺼낸 당사자가 머쓱해서, “I was just saying! - 그냥 해본 소리야!” 한다. 제3의 사나이가 끼어들어, “왜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하며 볼멘 소리를 낸다. 나는 얼른 묻는다. “Why do we talk? – 우리는 왜 말을 하지?” 로버트가 대뜸 ‘도움을 받기 위해서요’ 한다. 정보를 얻기 위함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구글 검색을 하면 될 텐데? 허기사 정신과 심리상담도 자신에 대..

|컬럼| 242. 꿈, 그 제3의 공간

정신과에서 말하는 자아(ego)는 혹독한 주인 셋을 섬기는 하인이다. 자아는 첫째 본능의 욕구를 들어줘야 하고, 둘째는 현실이 주는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고, 셋째로 양심과 도덕을 들먹이는 초자아(superego)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소시민은 낮 동안 직장에서 이 셋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퇴근하여 한밤중에 까칠한 현실을 떠나서 꿈나라로 도피한다. 수면은 현실로부터의 바캉스다. 열대의 피서지 해변에서 조그만 종이우산을 꽂아 놓은 칵테일을 마시는 쾌적함은 아닐지언정 당신과 나의 두뇌조직은 수면을 취하는 동안만큼은 편안히 쉬고 싶다. 아늑한 꿈의 공간은 직장도 집도 아닌 제3의 공간이다. 그러나 꿈을 꾸는 동안 우리에게 완벽한 휴식은 주어지지 않는다. 기쁜 꿈, 슬픈 꿈, 혹가다 악몽마저 꾸는 우리의 자아..

|컬럼| 423. 007 가방

숀 코네리(Sean Connery, 1930~2020) 주연 007 시리즈 총 7개를 인터넷을 뒤져 다시 본다. 20세기,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인간 발자국을 남긴 1960년대 초반에 시작해서 21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쓴 육중하고, 좀 능글맞고, 배짱 좋은, 본드, 제임스 본드! 제임스 본드 시리즈 처음 4편은 해마다 쉬임 없이 나왔다. ‘살인번호, Dr. No(1962)’,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1963), ‘Goldfinger(1964)’, ‘Thunderball(1965)’. 나머지 세 편은 띄엄띄엄 나왔다. ‘You Can Only Live Twice(1967)’, ‘Diamonds are forever(1971)’, ‘Never Say Never Again (1..

|컬럼| 422. 붙기를 좋아하세요?

예나 지금이나 누구나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붙는 것이 큰 소망이다. 왼쪽 안 주머니에 납작한 엿 덩어리를 품고 입시장에 가던 기억이 난다. 끈적한 엿의 점성(粘性)으로 시험에 붙고 싶은 심정이었다. ‘붙다’는 시험에 붙는 것 외에도 불이 붙다, 붙어 다니다, 이자가 붙다, 싸움이 붙다 등등 그 뜻이 매우 다채롭다. 당신과 나는 남에게 그럴 듯한 별명도 붙여주고 좋은 직장에 오래 붙어있기를 원한다. 붙는다는 것은 대개 좋은 일이다. 낯선 나라에 적응하는데 점점 속도가 붙으면서 타향에 정을 붙이고 사는 재미가 그런대로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마음에 든다. 문화적, 정서적 붙임성이 좋은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남달리 쉽게 정을 붙이는 과정이다. 남녀 간에 정이 붙으면 서로에게 애..

|컬럼| 286. 사랑스러운 붙음

당신과 내가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윤회설과 인과응보 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12인연 법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고리를 연결한다. ①무명(無明) ②행(行) ③식(識) ④명색(名色) ⑤6입(六入) ⑥촉(觸) ⑦수(受) ⑧애(愛) ⑨취(取) ⑩유(有) ⑪생(生) ⑫노사(老死). 이런 한자어로 우리를 압도하는 묵직한 문자들 때문에 주눅이 들지는 말거라. '①무지 ②행동 ③의식 ④명색 ⑤6개 감각 ⑥만지기 ⑦받기 ⑧사랑하기 ⑨갖기 ⑩존재하기 ⑪태어나기 ⑫쇠퇴하기'라고 쉽게 풀면 고만인 것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춤추듯이 돌아가는 이 삼라만상의 변천 과정에 애착이라는 현대심리학 용어를 적용시키는 학구적인 작업에 몰입하기로 한다. 애착은 '⑥만지기 ⑦받기 ⑧사랑하기 ⑨갖기 ⑩존재하기'라는 명찰을 가슴에..

|컬럼| 421. 이상한 사람들

저스틴은 가끔 병동 화장실에 수건이나 다른 물건을 넣어 변기를 막히게 해서 아래층 모든 병동 화장실의 변기 물 또한 불통하게 만든다. 남이 안보는 사이에 문 손잡이를 정성껏 핥기도 하고 다른 이상한 짓도 곧잘 한다. 그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차림새가 깔끔한 40대 백인. 저 자신은 유머 감각이 전혀 없지만 남이 우스개 말을 하면 어설프게 웃는다. 늘 고개를 푹 숙인 자세. 내가 말을 걸면 짤막하게 대답한다. 저스틴은 남들을 상대하기가 불안하고 불편하다. 70대 홀어머니가 병동으로 전화를 해도 되도록 통화를 피하다가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말 몇 마디 후에 전화를 끊는다. 자폐 스펙트럼 중에서 정도가 심한 영역에 속하지만 얼굴이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저스틴과 운 좋게 긴 대화를 나눴다. 병동 변기가 막..

|컬럼| 416. 낯선 사람에게 말하기

커다란 양초들이 즐비하게 진열된 어느 백화점 향초 섹션을 머뭇거린다. “초콜릿보다 바닐라 냄새가 더 좋아요,” 하며 한 백인 중년 부인이 등뒤로 바쁘게 말하면서 지나간다. 나는 두 향초를 킁킁대며 검토한다. 초콜릿 냄새는 공허감을 자극하는 반면에 바닐라 향기는 왠지 마음을 가라앉히는 느낌이다. 그 여자는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초콜릿향과 바닐라향 사이에서 고민하는 나를 도와주려는 의향이었나. 그녀가 낯선 사람에게 훌쩍 말을 던지고 지나간 것이다.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 1963~)의 2019년 저서 를 읽었다. 이듬해 한국에서 번역판이 나왔는데 제목을 이라 해 놓았다는 것을 검색해서 알았다. 저자는 2015년 7월,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일어난 30세의 히스패닉계 경찰과 28살..

|컬럼| 420. 3등분 마음

Strong minds discuss ideas, average minds discuss events, weak minds discuss people. – Socrates (강한 마음은 아이디어를 말한다. 보통 마음은 일을 말한다. 약한 마음은 사람을 말한다. – 소크라테스) 선과 악, 천국과 지옥 같은 이분법을 벗어나서 사람들을 3등분하는 사고방식이다. 3차원은 공간을 창출한다. 3차원은 2차원보다 월등하다. 성부, 성자, 성령이 이루는 3위일체 카톨릭 사상. 본능, 자아, 초자아가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정신분석의 기본. 입법, 사법, 행정으로 나뉘는 3권분립의 정부체제. 우리의 사고방식에는 이렇게 셋이라는 숫자가 자주 들어간다. 넷, 다섯, 여섯 하다 보면 갈래가 많아져서 어려워지는 것인지. 대개..

|컬럼| 419. 아인슈타인을 공부하는 라일리

“Weak people revenge. Strong people forgive. Intellectual people ignore: 약자(弱者)는 복수한다. 강자(强者)는 용서한다. 지자(知者)는 간과한다.” – 아인슈타인 라일리는 걸핏하면 다른 환자와 싸우고 기물 파손을 일삼는 극심한 성격장애 때문에 내 병동에 오래 머문다. 불철주야로 병동 직원들을 괴롭히는 데 이골이 난 30대 백인 청년. 주름진 아인슈타인 얼굴이 들어간 배경에 이 짧은 세 개의 문장이 돋보이는 인터넷 파일을 프린트해서 그에게 주며 벽에 붙여 놓고 뜻을 되새기라고 타이른다. 그는 네, 그러겠습니다, 하고 기꺼이 대답한다. 걱정이나 짜증거리가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비를 걸고 주먹다짐을 하는 둥, 꼭 남을 기분 나쁘게 해야 직성이 ..

|컬럼| 186. 방뇨자(放尿者)

기원전 5, 6백 년 전쯤 중국의 공자(B.C. 551~479)보다 19 살 어리게 태어난 그리스의 피타고라스(B.C. 570~495)는 생도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한편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훈시하기로 이골이 났던 위인이었다. 피타고라스는 태양을 향해서 방뇨하지 말라고 강조했고 금(金)으로 만든 보석을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문하생들에게 언성을 높였다. 직각 삼각형의 빗변의 길이에 대한 법칙을 밝혀낸 그는 수학보다 행동심리학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징기스칸(A.D. 1162~1227)을 기억할지어다. 공자나 피타고라스 시대보다 1600년 정도 세월이 흐른 후 아세아는 물론이며 유럽에까지 막강한 위세를 떨치던 동양의 영웅, 징기스칸! 그는 14개의 금칙을 선포하고 그 법을 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