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83

|컬럼| 483. 감각 프로토콜

오감(五感)을 생각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태아의 발달과정을 살펴본다. 임신 2개월에 눈의 망막이 생기며 3개월에 내이(內耳)가 자리를 잡고 혀에 맛봉오리가 솟아나는 태아. 당신과 나는 4개월의 태아였을 때 엄마 자궁 속에서 빛에 반응을 보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손가락을 빨기도 했다. 6개월때쯤 엄마 목소리와 다른 소리를 인지하고 7개월에 단맛 쓴맛을 분별했고 8개월에는 소리의 강약과 고저와 엄마 냄새 또한 알아냈던 것이다.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 태아 발달과정의 흑백 그림을 상기한다. 왕방울처럼 커다란 눈에 등이 휘어진 생선 같은 생명체가 벌써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무언가를 피부로 느끼다니.  태아의 입과 혀는 말을 하는 대신에 자기 손가락을 빨고있다. 젖..

|컬럼| 482. 주삿바늘과 아메리칸 치즈

내가 전병원의 ‘lunch coverage’를 맡는 날, 점심시간 끝 무렵. ‘Code Green’, 위기상황을 알리는 확성기에서 명시하는 장소가 3층 식당이다. 어느 병동 환자가 무슨 일을 터뜨렸을까. 나이가 스물 안짝으로 뵈면서 좀 뚱뚱한 여자환자가 식당 앞 복도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다리를 뻗은 채 ‘L-shaped’, 니은(ㄴ)자로 앉아있다. 병동직원 서넛이 그녀를 둘러싸고 무언지 큰 목소리로 설득하고 있는 상황. 환자는 눈을 아래로 깐 채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기색. 무슨 일입니까? 글쎄, 식사를 끝내고 다들 병동으로 돌아갔는데 이 환자 혼자서만 벽에 기대앉아 한 마디 말도 없이 꼼짝달싹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얘는 평소에 남들과 의사소통을 곧잘 하는 편입니까? 암, 그렇고 말고요.  이름이 뭐..

|컬럼| 481. 오해

뒷마당 풀밭에 사슴 한 마리 서 있다. 그에게 살금살금 접근해서 정면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사슴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생후 몇 달 안되는 손녀딸을 팔에 안는다. 그녀는 아주 차분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살핀다. 이 아이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토끼와 호랑이가 동화에서 말을 주고 받는다. 동화작가는 의인화(擬人化) 기법으로 동물을 사람으로 둔갑시킨다. 말은 생각을 전제로 하는 법. 당신의 손짓발짓, 웃거나 찌푸리는 얼굴, 짧은 탄성 같은 것들은 비언어(非言語)적인 도우미 역할을 할 뿐 세련된 ‘마스터 오브 세리머니’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아이가 어른처럼 언어를 사용해서 생각한다는 설정을 성인화(成人化)라 한다. 나는 사슴도 손녀딸도 언어를 훌륭하게 ..

|컬럼| 480. Hungry, Angry, Lonely, Tired

Alcoholics Anonymous(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모임 슬로건에 심도 깊은 컨셉이 많이 있다. ‘Forgive and forget, 용서하고 잊어라’, ‘Let go and let God, 놓아버리고 신에게 맡겨라’ 하는 금언들이 그렇다. 슬로건은 운율감으로 호소력을 높인다. 금주(禁酒)가 걱정되는 경고, ‘Hungry, Angry, Lonely, Tired’가 있는데 약자로 ‘H.A.L.T’라 한다. 군대용어로 잘 쓰이는 ‘halt’는 ‘hold’와 같은 말뿌리로 ‘멈추다’라는 뜻.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보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허기지고, 화가 나고, 외롭고, 고달픈 것은 별로 권장할 만한 정황이 아니다. 허기와 고달픔은 육체적 증상 뿐만 아니라 정신상태까지 포함한다. 배가 고..

|컬럼| 479. 똥꿈

똥꿈 신라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오줌 꿈’을 꾼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보희가 산 위에서 배설한 오줌이 엄청난 분량으로 서라벌 땅을 적시는 꿈이다. 동생 문희는 비단치마 한 벌을 언니에게 건네주고 그 길몽(吉夢)을 산다.  문희는 오빠 김유신의 계략으로 선덕여왕 왕실의 고위급 인사 김춘추와 여차여차하여 정을 맺는다.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그와 혼인하여 7세기 중반에 왕비가 된 문희는 언니의 꿈을 매입하고 팔자를 고친 셈이다. 그룹 세션. 간밤에 똥을 만지는 꿈을 꿨다고 한 환자가 밑도 끝도 없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한다. 꿈은 속뜻과 겉 뜻이 반대일 경우가 많다고 했지. 우리의 무의식은 겉과 속이 반대일 때가 많다니까. 한국의 민속신앙에서 ‘똥꿈’은 재운(財運)을 예고하는 꿈이기 때문에 한국인..

|컬럼| 430. 멘붕(Men崩)

병동환자 브루스가 틈만 생기면 주장한다. “I am not mental.” - 표준영어로 “I am not mentally ill.” 할 것을 줄여서 하는 말. 자기는 정신병이 없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병동에 체류할 이유가 없으니까 어서 퇴원을 시켜달라는 압력이다. 병원 말고 딱히 살 곳이 없을 뿐더러 설사 있다 치더라도 이런 식으로 강짜를 부리는 환자를 받아주는 시설이나 프로그램은 없다. 그도 나도 ‘멘붕’이 일어날 정도다.멘붕은 브루스가 떠들어대는 ‘mental’의 ‘men’과 붕괴(崩壞)의 첫 자의 합성어로서 2000년대부터 한국에서 유행한 말이다. 2012년에 그해 최고의 유행어로 뽑혔다. 정신이 무너지고 깨진다는 뜻. 실성했다, 정신줄이 나갔다, 심하게는 미쳤다는 표현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영..

|컬럼| 373. 달 빨아들이기

아프리카 마사이족은 인사할 때 상대방 얼굴에 침을 뱉는다. 물이 귀한 건조지대에 살면서 서로에게 수분을 전해 주는 습관이란다. 결혼식에서도 하객들이 삥 둘러서서 신부에게 성심성의껏 침을 뱉는다. 마사이 족의 해와 달에 대한 신화가 있다. - 사소한 일로 남편인 해가 아내인 달을 때린다. 달이 덤벼들어 해의 얼굴을 할퀸다. 해는 달의 얼굴에 수많은 상처를 입히고 한쪽 눈알을 빼 버린다. 남성우월자 해는 자기의 흉한 꼴을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더 강렬하게 빛을 내뿜는다. 눈이 부셔 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남들에게 그의 체통은 유지된다. 달은 상흔을 감추는 기색도 없이 밤하늘을 마냥 은은하게 밝혀준다. 이 신화가 마음에 든다. 인사법만큼이나 기존관념을 깬 사고방식에 매료된다. 해는 가까이하기에 무섭고 두..

|컬럼| 158. 눈치 코치

'hunch'는 워낙 15세기경 '튀어나오다' 혹은 '돌출하다'는 말이었고 나중에 어깨나 등을 활처럼 구부린다는 뜻이 됐다. 등허리가 튀어나왔다 해서 꼽추를 'hunchback'이라 한다. 그러던 'hunch'가 1904년부터는 '예감'이라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어떤 예감이 떠 오를 때 생각이 한쪽으로 쏠리거나 튀어나오는 모양이다.  'hunch'는 송이, 뭉치 또는 다발을 일컫는 'bunch'와 말 뿌리를 같이한다. 해리 벨라폰테의 히트곡 '바나나 보트 송'의 중간부분에 "Six foot, seven foot, eight foot BUNCH!" 하는 바로 그 'bunch'도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나나를 다발로 묶어 놓은 자마이카의 야간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다. 그들이 아침 해가 밝아오자 ..

|컬럼| 478. 혼동

어릴 적에 혼동과 혼돈의 뜻이 곧잘 헷갈렸다. 서로 발음이 비슷해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도 좀 그렇다.  네이버 사전은 ‘혼동(섞을 混, 같은 同)’을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뒤섞어서 보거나 생각함’, 그리고 ‘혼돈(섞을 혼, 막힐 沌)을 ‘마구 뒤섞여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이라 풀이한다. 영어로 혼동은 ‘confusion’. 혼돈은 ‘chaos’. 이 두 말은 발음이 서로 생판 다르기 때문에 뜻이 섞갈리지 않는다.  요컨대 혼동과 혼돈은 뒤섞거나 뒤섞이는 것이 문제다. 불고기, 상추, 고추장, 등등을 숟가락으로 뒤섞어 비벼먹는 비빔밥은 별로 열띤 토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을 비빔밥 먹는 식으로 하는 사람은 생각이 부실하다는 말을 듣는다. 오늘 그룹세션 타이틀은 ‘confu..

|컬럼| 477. 경우

정치평론 위주의 유튜브를 보며 한국말 쓰임새를 배운다. 귀가 닳도록 ‘누구누구 같은 경우’라는 말을 듣는다. 이를테면, ‘홍길동은…’ 하는 대신에 ‘홍길동 같은 경우에는…’하는 표현을.  홍길동은 사람이 아니라 ‘경우’다. 홍길동이 유일무이하지 않고 홍길동 ’같은’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암시다. 개별성은 없고 동질성만, 개인은 없고 단체만 존재한다는 사고방식, 소신 있고 개별적인 정치가는 없고 당에 충실한 당원(黨員)만 있다는 식이다. 우리 ‘DNA’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대인기피증의 소치일까. 상대의 ‘first name’을 부모가 자식 이름을 부르듯 불러대는 미국적 말습관에 반하여 우리는 성명(姓名, full name) 뒤에 직함을 꼭 부친다. 이를테면,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대표! 성씨(姓氏, 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