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76

|컬럼| 476. 익숙하다니

익숙하다는 말이 한자어인 줄 알았다. 아니다. ‘익熟’은 순수 우리말과 한자의 혼성어다. (熟: 익을 숙) ‘익다’는 열매, 씨가 여물거나, 고기, 채소, 곡식 따위의 날것이 뜨거운 열을 받아 그 성질과 맛이 달라지거나, 김치, 술, 장 따위가 맛이 든다는 뜻이라 사전은 풀이한다. ‘익숙’은 ‘해변가’, ‘처갓집’처럼 같은 뜻을 두 번 반복하는 말이다.  ‘익다’에는 ‘자주 경험하여 서투르지 않다’, ‘여러 번 겪어 설지 않다’는 뜻도 있다. 충분히 익지 않은 상태를 ‘설익다’라 하고 ‘낯설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낯이 익숙하지 않다는 의미. ‘설다’도 순수 우리말로서 ‘익다’의 반대말. ‘설날’은 새로운 해의 첫날이 낯설은 날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위키백과는 설명한다. 설날은 설익은 날. 해묵은 날이..

|컬럼| 475. 욕

사이버스페이스를 드나드는 지구촌 사람들이 욕을 하는 성향에 대한 통계를 읽는다. 뉴욕 포스트는 미국내에서 가장 욕을 자주하는 사람들이 뉴요커가 아니라며 실망스러운 기색을 보인다. 1등은커녕 17등으로 밀린 뉴욕 시티. 영화에서 자주 보는, 말끝마다 욕을 쏟아대는 맨해튼 거리의 풍경은 터무니없는 과장이라는 판명이다. 2024년 8월에 1000명의 온라인 트위터 메시지를 대상으로 한 집계를 따르면 미국에서 욕을 제일 잘하는 도시는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라는 것. 볼티모어는 선원들이 많이 사는 항구다. 뱃사람들은 워낙 바다에 대한 공포심에서 욕을 잘한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네이버 사전은 욕(辱)이라는 한자어를 이렇게 풀이한다. ➀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 남을 저주하는 말. ➁아랫사람의..

|컬럼| 19. 우리집 옆집 도둑괭이가

영어 슬랭에 고양이가 자주 나온다. 우리말 속어에는 ‘여우'가 더러 등장하지만 고양이는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간단하게 대충 물만 찍어 바르는 세수를 ‘고양이 세수'라고 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라는 뜻으로 ‘There's more than one way to skin a cat (고양이 껍질을 벗기는 방법이 하나 둘이 아니다.)’라는 속어가 있다. 양키들이 예상 외로 시치미를 뚝 따고 쓰는 표현인데 그 때마다 말하는 사람의 안색을 잘 살펴보면 고양이의 야들야들한 살갗을 벗기는 따위의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고양이가 들어가는 영어 속담을 조사해 보자. ‘Curiosity killed the cat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였다.)’ 즉, 호기심이 너무..

|컬럼| 474. 과거애착증

우리는 왜 어둡고 괴로운 과거에 매달리는가. 당신은 숱한 과거의 기억 중 어찌 그리도 아프고 슬픈 과거에 집착하는가. 따스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활짝 웃으며 ‘Happy Birthday to You~♪’ 하며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입을 모아 노래하던 즐거운 메모리 등등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인가.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케네디 공항에 항공기가 안전하게 착륙하는 일상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어느 날 비행기가 추락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서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는 뉴스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일제히 쏠리지요. 나는 허전한 생일파티 등등보다 잘못하면 나의 안전이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에 조마조마해집니다. 자기보존본능은 모든 생물체의 생존을 위한 기본여건이다. ..

|컬럼| 473. 버딘스키

환자들 간에 말다툼이 일어난다. 금세 주먹다짐이 터진다. 정치가들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난다. 그들의 말다툼은 주먹다짐 대신 막말잔치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룹테러피 세션에 나는 환자들의 인내심 부족과 미숙한 언변을 염두에 두면서 자유토론을 멀리하고 강연 형식을 취하려 애를 쓴다. 마치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사라도 된듯한 기분이다. 남의 말을 가로막는 습관이 있는 환자가 눈을 크게 뜨고 앉아있다. 그는 내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재빨리 끼어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하거나 주제와 관계없는 말을 꺼낸다. 다른 환자가 “Hey, Mr. Buttinksi!” 하며 그를 향하여 목소리를 높인다.  참 오랜만에 듣는 속어, ‘Buttinski’다. ‘butt in’에 도스토예프스키 또는 차이코프스키 같은 북유럽식 이름의..

|컬럼| 472. 왜 소리를 지르는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전 병원에 ‘Code Green’이 확성기로 울린다. 환자도 병동직원도 코드그린이 자기네 병동이 아니기를 바라며 귀를 쫑긋 세운다.  코드그린은 정신과적 위기상황을 알리는 응급 시그널이다. 인근 직원들이 급히 서둘러 해당 병동으로 운집한다. 환자가 직원을 때린 경우에도 화급하게 터지는 코드그린.   교통신호등 ‘green’은 직진 또는 우회전을 해도 좋다는 마음 편해지는 신호인 반면에 ‘red’는 차를 정지하라는 위험신호다. 나는 가끔 위기상황을 ‘Code Red’라 해야 되지 않나, 하는 한심한 생각을 하며 현장으로 뛰어간다.  관료적인 단어선택은 늘 부드러움을 우선으로 삼지만, 사실 코드그린에 반응하는 모든 직원들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확성기가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것만으로 모자..

|컬럼| 471. 지구 들어올리기

“내가 설수 있는 단단한 자리와 지렛대를 주면 나는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 Give me a firm place to stand and a lever and I can move the Earth.” 라고 말한 아르키메데스를 생각한다.  ‘내게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주면 나는 성격장애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병동직원에게 나는 속삭인다. 건방지거나 건성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단,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와 나의 시간은 둘 다 충분히 길어야 한다는 점이 이슈다. 부모님 3년상이 우리의 오랜 유교식 전통이지만 현대에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 기간을 약정해 놓은 사회적 통념에는 정신과적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식이 부모를 잃은 트라우마의 심리적 아픔이 어느 정도 사라지는데 그 정도 시간..

|컬럼| 449. 독백

옛날 정신과수련의 때 뉴저지 큰 정신병원에서 주말 문라이팅, ‘알바’를 한적이 있다. 노인병동에서 두 노인이 하는 대화를 엿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쪽이 자기는 변비가 심하다고 투덜댄다. 다른 쪽은 수십 년 전 취중운전으로 아들이 감옥에 갔던 이야기를 한다. 둘은 서로 말을 오버랩 하지 않고 상대가 말을 멈추면 자기 말을 한다. 상대의 말에 대한 반응은 없다. 계속해서 웃는 얼굴 표정으로 독백을 이어가는 그들! 화자(話者)와 청자(聽者)가 말을 ‘주고 받는’ 행위를 대화(對話)라 하지 않는가. 자기 말만 열심히 할 뿐 상대가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그들이다. 그룹테러피 중 환자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혼잣말을 하는가. ‘멘탈 체크, mental check’를 하기 위해서라고 누가 답한다. 나도 가끔..

|컬럼| 470.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그룹테러피를 시작하면서 투덜대듯 말한다. 내가 시시때때 혼자 궁금해하는 의문점이 하나 있다. 그룹에게 우울증에 관하여 말하면 그룹멤버들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분노에 대하여 언급하면 노기를 띄운다. 평화에 대하여 말하면 장내 분위기가 고요하다.  그룹을 시작할 때 내가 내세우는 우울증, 분노, 평화 따위는 하나의 화제(話題, 얘깃거리, 토픽)일 뿐인데 이것은 참 이상하지 않는가. 범죄를 화제로 삼으면 그룹멤버들이 범죄자가 되고 신을 언급하면 멤버들이 모두신이 된다는 말인가. 그룹리더가 최면술사인가. “그룹=그룹 토픽 자체”? 민중의 리더 역할을 하는 정치가는 최면술사인가. 언론을 ‘medium’의 복수, ‘media, 미디어, 매체’라 한다. 옷 안쪽에 찍혀 있는 ‘medium’이라는 표시는 옷의 크기가 중..

|컬럼| 469. 피자와 막대기

병동의 규칙을 언급하면 묵묵무답. 그러나 피자를 화제로 삼으면 모두의 표정이 환해지는 금요일 오후 그룹 세션이다. 우리는 왜 규칙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피자라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는가. 피자 냄새와 맛이 연상되는 순간 후각과 미각이 합쳐져서 감각적 본능을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리처드가 묻는다. 한국인들도 피자를 좋아합니까. 토핑으로 무엇을 얹어 먹습니까. ‘pizza’는 ‘피쩌’라 발음하면 어쩐지 공격적으로 들린다. 경음을 피하고 ‘피자’, ‘자장면’이라 하면 맥없이 부드러운 기분이다. ‘noodle, 국수’, ‘chop suey, 잡채’ 같은 발음도 다분히 여성적이다.  납작한 빵을 뜻하는 히브리어 ‘pita’와 그리스어 ‘petta’는 ‘pizza’와 말뿌리가 같다. ‘피쩌’는 전인도유럽어의 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