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403. 아령의 흉터

서 량 2021. 11. 29. 09:55

 

맨해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2021년 11월 현재 전시중인 ‘Surrealism Beyond Borders’를 관람했다. ‘경계 없는 초현실주의’의 황홀한 시간!

 

프랑스 시인, 정신과의사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1986~1966)이 1924년에 선포한 ‘초현실주의 성명서’를 곱씹는다. 그의 폭탄 선언은 시(詩)에서 출발하여 모든 예술 분야에 걸쳐 전세계에 들불처럼 번졌다. 브르통은 당시 프로이트가 주창한 ‘무의식’과 그의 획기적인 논문 ‘꿈의 해석’에 큰 영향을 받았다 한다.

 

초현실과 꿈은 무의식의 텃밭에서 피어나는 의식의 꽃이다. 초현실의 뿌리에는 무의식이라는 본능이 도사리고 있다. 초현실에는 심리적 안전을 꾀하는 방어기전과 성적본능의 줄기와 잔가지들이 숨어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수면 아래에 잠겨서 맨눈에 뵈지 않는 빙산 아랫도리의 비밀을 파헤친다.

 

초현실은 꿈의 탁본(拓本)이다. 비석, 기와, 기물 따위에 새겨진 글씨나 무늬에 종이를 문질러 떠낸 사본(寫本)이다. 초등학교 때 자주 나갔던 사생(寫生)대회가 그랬고 지금도 핸드폰으로 찍어 대는 사진(寫眞)이 또 그렇다. ‘베낄 寫’! 꿈과 초현실은 현실을 베껴 복사한다. 영화처럼 복사체는 실제가 아니다.

 

꿈에는 전위(轉位, 자리바꿈)라는 현상이 있다. 본능 속에 파견 나와있는 검열당국이 꺼려하는 출현자나 배경을 바꿔치는 수법. 이 디펜스는 생시의 언어생활에도 확실히 적용된다. 직설을 피하는 완곡한 말 습관, 섹스를 언급하는 대신 ‘같이 잤다’는 표현이 좋은 예. 당사자는 물론 듣는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애타적(愛他的) 아량이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이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노린다. 이른바 낯설게 하기,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이다. 일상적 사물에 적용되는 상식을 뒤엎고 생뚱맞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시에서는 전위와 데페이즈망 둘 다 자유자재로 쓰이는 것이 재미있다.

 

꿈도 예술도 시도 드라마가 있어야 제격이지. 그래야 나라는 내 꿈의 관람자와 미술관 방문자와 시 독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법. 애매모호한 추상은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구체성을 추구한다. 비주얼(visual, 시각적) 감각이 강한 자극을 제공하는 구체성!

 

내가 좋아하는 낯설은 이미지의 대가, 벨기에의 초현실파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는 이렇게 말한다. - “상징적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이미지에 담겨진 시(詩)와 미스테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얼마나 통쾌한 발언인가.

 

꿈은 여러 요소를 응집한 압축파일이다. 알쏭달쏭한 프레젠테이션이다. 꿈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초현실을 감추고있다. 자꾸 더 캐물으면 보충설명을 하는 작화(作話, 말짓기) 증세를 내보인다. 어차피 꿈의 어원은 ‘꾸미다’라는 학설이 유력한 터. 거짓 꿈도 꿈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다녀온 그날 밤 꿈에 아령을 보았다. 고등학교 때 손에 잡고 흔들던 그 아령에 큰 흉터가 보인다. 아령을 하고 싶은 욕망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불현듯 다음날 아마존에서 아령을 주문했다.

 

아령이 배달된 며칠 후 ‘아령과 비둘기’라는 제목으로 이런 시를 썼다. -- (전략)… 아령의 흉터에 심하게 신경을 쓴다/ 아령은 내게 막강한 권리를 부여한다/ 아령이 나를 서서히 장악한다/ 아령 양 가슴에 이윽고 튀어나오는 알통/ 회색 바탕에 무지개 빛 맴도는/ 사나운 비둘기 한 마리 푸드득 날아가는 순간에… (후략)

 

© 서 량 2021.11.28

-- 뉴욕 중앙일보 2021년 12월 1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s://news.koreadaily.com/2021/11/30/society/opinion/20211130172036687.html

 

[잠망경] 아령의 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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