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130

빨강에 관하여 / 김정기

빨강에 관하여 김정기 빨간 빗살 두 개가 빠져있는 화장실에서 손풍금 소리가 난다 초경의 갯비린내 바람에 쓸려나가고 빨간 글씨 위에 누워있는 큰언니 다홍치마 날린다 빨간 딱지에 징용된 애인 마른 숲을 헤치고 찾아 간 연병장에 피어있던 사루비아 꽃무리 쳐들어온다 이제 와보니 빨강은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문 동맥의 꿈틀거림이던가 헐거워진 신발 벗어보니 젊음을 목조이던 빨간 구두 한 켤레 치과에 갈 때, 짜장면 먹으러 갈 때 빨간 립스틱 지운다 저 나라까지 데려가야 할 빨간 가죽 모자 © 김정기 2009.10.27

고등어 / 김정기

고등어 김정기 훌쩍이기 시작했다. 인도양을 떠돌던 배에 건져져서 뉴욕 항에 내려진 등 푸른 고등어는 백인 양부모 품에서 자라 보석감정사로 일하고 있다며 급행버스 내 옆자리에 앉아 흰 실로 레이스를 짜는 흑인여자는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물기를 손등으로 받아낸다. 은구슬 같은 눈물을 섞어 짜여진 치마를 입고 고향바다 깊은 물속으로 돌아간단다. 그 바닷물에 잠기려고 푸르죽죽한 살결에 반듯한 이마를 들고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42가 사람들 틈으로 헤엄쳐 갔다 오늘 저녁 고등어 살을 저미니 검붉은 피가 흘러 도마에 아프리카 지도를 그린다. © 김정기 2009.10.14

아욱국 / 김정기

아욱국 김정기 제목도 모른다 어느 간이역 나무 평상이 놓여있는 드라마를 보며 그저 저기 앉고 싶다. 앉을 자리만 보이는 눈으로 아욱을 다듬는다. 줄기는 껍질을 벗기고 이파리 하나씩 살펴보니 상처 없는 잎이 어디 있던가. 잎맥에 가는 줄이 있는가 하면. 조그만 벌레가 갉은 흔적이라던가. 바람결에 구겨진 흉터라도 남아있는 아욱을 풋내 빠지도록 주물러 마른 새우 넣고 조선된장 풀어 국을 끓인다. 들깨가루를 넣어야 구수하다고 대중 쳐서 얹고 아욱이 부드러워 질 때까지 약한 불에 놓는다. 이제 풋내나는 들판의 바람결도 삭아 아욱은 예감까지 익어 버린다. 드라마는 여자주인공이 풀이 죽어서 집을 떠나면서 약간 늘어진 눈꺼풀을 치키며 아직 남아있는 가을을 향해 손을 흔든다. © 김정기 2009.10.14

우유 따르는 여자 / 김정기

우유 따르는 여자 김정기 아직도 여자는 우유를 따르고 있다. 삼백 년도 넘게 따른 우유는 넘치고 넘쳐서 어디로 해서 어느 강으로 몸을 섞었을까. 왼쪽 창문을 통해 들어온 태양은 여자의 왼쪽 팔에서 튀고 짙은 남색 앞치마에 안긴다. 그리고 머릿수건 뒤에 가서 빛으로 조용히 머문다. 허름한 부엌 벽 위에 걸린 바구니 속에 담긴 곡식은 아마 지금쯤 싹이 나서 셀 수 없는 낱알을 만들었겠지 그러나 보았다, 식탁보 밑에 깔린 두꺼운 어두움 알 수 없는 그 나라의 냄새가 풍겨온다. 베르미어*는 신들린 붓으로 고요를 만들고 순하게 네모 반듯한 감옥에 서서 끝없이 우유를 따르고 있다 그 소리가 지금 나의 잔에도 스민다. 윗저고리의 황홀한 겨자 빛깔이 나부껴온다. 썩지 않는 빵들이 식탁 위에서 계속 발효되고 있다. *1..

야생 찹쌀 / 김정기

야생 찹쌀 김정기 걸어온 길이 멍 투성이라 진보라 눈물 범벅 되었네. 생쌀 맛에 반하여 씹어 먹고 굵은 소금 야생의 덩이 핥으며 감추어 온 치맛자락 땅에 끌리네. 넓은 소금 밭에 굴러서 소금 꽃이 되는 누런 가을 볏단을 지고 벼꽃이 되는 나의 식탁에 피는 야생의 비린내 그 처참한 빛의 굴절 밀림에 사는 족속으로 모두 던져버리려는 순간 입 속의 쌀알은 녹지 않고 소금은 짠물이 된다. 씹어야 넘어가는 단단한 야생 찹쌀 한 알로 입 속을 맴도는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김정기 2009.06.23

공기 번데기 / 김정기

공기 번데기 김정기 긴 바지 걷어 올리고 물 위를 걸으리. 조약돌 밟고 나면 숲이 다가와 얼비친 세상 놓아두고 궂은 굴곡 건너 어제 감은 머릿결 쓰다듬으며 지금껏 열려 본일 없는 서랍에서 끄집어내는 웃음을 지어 보리. 그의 공기 속에 들어가 살라고 하면. 쨍하게 열어젖힌 창 커튼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명주실 타래 되어 온몸을 감겨오면 그의 창공을 향해 한 마리 누에로 껍질을 벗으리. 공기 번데기로 풋풋한 청춘의 문을 다시 두드리는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내 눈에만 보이는 그의 나라 엿보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 뛰는 것은. 그가 말하는 두 개의 달을 동시에 바라보며 정말 떠나는 것이 절정이란 말인가 누구도 흉내 못 낼 공백에서 만드는 고요로 아 아 하루키*의 공기 속에 들어가 살라고 하면. *일본작..

모래 숨결 / 김정기

모래 숨결 김정기 숨이 막힌다 걸어 갈 사이마다 모래로 채워있다 모래를 혜쳐야 하늘이 보이고 정원의 나뭇잎 하나라도 만질 수 있으련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모두 모래다 발이 닿는 곳이 바다일 지라도 광야일 지라도 혈육의 숨결에 기댄다 모래로 가득찬 세상 모래로 가득찬 신발 세월이 내리는 모래 휘장에 막을 내리면 모래란 모래를 다 마시고 뜨겁게 닥아오시는 당신 기다리는 그날 막힌 공간이 열고 뛰어나간다 모래는 산소가 된다 숨결이 된다 © 김정기 2022.02.11

열네 번째 가을 / 김정기

열네 번째 가을 김정기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새어 나간다 열네 번의 가을을 찢으며 눈 뜨고 볼 수 없는 시간을 지웠다 연약한 가지에 채찍을 맞으면서도 버텨온 잎들, *카프카가 벽 위를 기어오르듯 바닥은 더 내려앉아 허공이 되고 열네 번의 가을은 더욱 춥다 무너져도 일어나는 강둑에 앉아 당신이 부르던 노래를 부르며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기도 열네 번 그래도 계절은 깊어 가고 곱다는 단풍들은 말한다 우리가 만날 곳은 끝없이 빛의 폭포가 쏟아진다고 날개를 달고 함께 나를 수도 있다고 시계가 없는 나라에서 끝 없이 어둠 없이 *Kafka(1883~1924):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을 파헤친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 김정기 2022.02.16

마침표 / 김정기

마침표 김정기 어디쯤 계신가요 당신이 부르던 노래 하늘에서 들려와서 나도 떠가려고 무게를 줄이고 있습니다 이슬비 내리는 날 가냘픈 음표가 되어 흰머리 정수리를 적시고 계시지요 세상에서 묻힌 먼지 서로 털어주며 남긴 발자국 돌아보지 말며 주름진 손 위에 안개 장갑 끼워 주시니 멀지않은 하늘길 손잡고 날아가요 지상에 남은 숙제 맞침표 찍고 그분이 계신 곳 마침표 없는 환한 나라에 우리 끝없이 머물러요 © 김정기 2022.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