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85

|컬럼| 347. 아내가 모자로 보이다니!

-- 시는 고삐가 풀린 감성이 아니라 감성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그것은 성격의 표현이 아니라 성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 티에스 엘리엇 (1919) 정신분석에서 쓰이는 자유연상 기법에 따라 시를 쓰려는 습관을 나는 오랫동안 키워온 것 같다. 어릴 적 처음 글짓기 시간에 지침으로 삼았던 ‘본 대로 느낀 대로’를 지금껏 따르려 한다. 무의식 속에 숨겨진 감성과 기억을 되살리기 위하여 앞뒤 문맥이 맞지 않아도 거리낌 없이 말하라고 정신분석은 권유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자유분방한 생각의 흐름을 시작(詩作)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좀 위험스러운 일이다. 말의 흐름이라는 것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면 소통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감성이 너무 앞을 가리거나 앞장을 서는 말투는 시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

|컬럼| 401. 따스한 가을

티. 이. 흄(T. E. Hulme: 1883~1917)의 짧은 시 “가을”(1908) 전문을 소개한다. 약간 차가운 가을 밤에/ 시골 길을 걸었네/ 그리고 얼굴이 벌건 농사꾼 같은/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 몸을 구부리는 걸 보았네/ 나는 멈춰 서서 말하지 않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네/ 그리고 주변에는 동네 아이들처럼 얼굴이 하얀/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었다네 시에 있어서 흄은 낭만과 고전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오는 이미지즘(imagism)을 이룩한 창시자로 손꼽힌다. 말 수와 수식어를 최소한으로 줄여 말하는 이미지즘 기법은 시 뿐만 아니라 껍데기를 벗겨 놓은 언어의 누드(nude) 데상 같다. 이미지즘은 로코코 스타일의 은유와 상징에 익숙한 예술 비평가들에게는 데면데면하게 느껴지는 시작법이다. 햇볕에 타..

|컬럼| 427. 터프 러브

오래 전 정신과 수련의 시절에 사무치게 배웠다. 환자와의 대화는 되도록 비현실적인 각도를 취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지혜, 두 인간이 나누는 세속적 대화보다는 정신분석적 원칙을 지키는 특이한 기법을. 환자가 스스로 체험하는 의식의 흐름을 막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일상적인 대화나 판에 박힌 인사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환자와 제멋대로 수다를 떠는 것은 경범이 아닌 중범죄로 생각한다. 환자를 접하면서 의사 자신이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은 가당치 않다. 정신과의사는 어딘지 좀 비인간적인 데가 있어야 한다. 지도교수는 고지식한 정신분석가였다. 그는 환자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직설적인 대화를 ‘football coach approach, 축구코치 어프로치’라 비판한다. 아무런 훈련 없이 누구든지 다 ..

|컬럼| 426. 쪽 팔리다

경기도 출생 아버지께서 옛날에 이쪽, 저쪽을 입짝, 접짝이라 이르셨다. 사전에 입짝, 접짝은 경기도와 강원도 방언이라 나와있다. 이때 ‘짝’은 표준어의 ‘쪽’, 방향을 뜻한다. 발음을 돕기 위한 비읍이 들어가서 이쪽, 저쪽이 입짝, 접짝으로 변한 것이다. 무엇이 대문짝만하다는 말은 좀 익살스러운 표현으로 물건의 사이즈가 매우 크다는 뜻이다. 이때 ‘짝’은 비하(卑下)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헌신짝, 화투짝, 등짝, 볼기짝, 낯짝 같은 말이 좋은 예다. 쪽마루, 쪽거울, 쪽지, 쪽김치, 쪽문 같은 작은 사이즈를 뜻하는 접두사처럼 ‘쪽’은 방향을 뜻하는 대신에 크기를 소재로 삼는다. 윤석중의 ‘낮에 나온 반달’ 나오는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에서도 쪽박은 조그만 바가지를 뜻한다. 만약에 누가 ‘낯..

|컬럼| 425. 자막 처리

병동에서 두 환자들 간에 주먹다짐이 터졌다. 한밤에 일어난 일. 간호일지에 올라온 리포트에 이유불명이라 적혀 있다. 이 두 환자의 성품이며 공격성이 어떻게 다른지, 서로가 어떤 상황에 민감한 성격인지 나는 알고 있다. 한쪽은 늘 시끌벅적하게 말이 많은 편이고 다른 쪽은 좀 둔감한 듯하지만 때에 따라 사나운 언행도 마다치 않는다. 편의상 이 글에서 전자를 C, 후자를 A라 부를까 한다. 당직의사가 A에게 진정제 주사 처방을 내렸다. 보조간호사가 뜯어말리기까지 서로들 치고 박고 싸웠지만 C가 갈비뼈가 부러졌다며 엄살을 부렸고 A는 C를 향하여 계속 공격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이유로 이루어진 처사로 보인다. A는 언어감각이 C를 쫓아가지 못한다. 당직의사는 C를 피해자로, A를 가해자로 판단을 내린 후 응당 가..

|컬럼| 340. 말희롱

'sexual harassment’를 성희롱(性戱弄)이라 하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harassment’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성가시게 하고 못살게 굴고 괴롭히는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희롱’이라는 말에는 어쩔 수 없는 장난끼가 숨어 있다. 남을 괴롭힌다는 것과 남에게 장난을 치는 행동이 때에 따라 그놈이 그놈일 수도 있지만 감성의 농도가 크게 다를 수 있다. 빨강색과 분홍색이 엄연히 다르듯이. 욕설 어린 비방과 농담이 깃든 비평이 확연히 다르듯이. 성희롱은 가끔 성추행, 성폭행 또는 성적 학대라는 말로 바뀌기도 한다. 화제의 예민성 때문에 자극의 강도를 분별하기가 힘이 들어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해요. 나는 ‘sexual harassment’를 우리말로 ‘성적 괴롭힘’..

|컬럼| 424. 우리는 왜 말을 하는가

일정한 토픽 없이 그룹 세션을 시작한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화제를 포착하려는 의도에서 자유연상으로 의식의 흐름을 도모한다. 정신분석이 추구하는 다이나믹한 기법.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누군가 밖의 날씨가 참 좋다고 말한다. 야, 이놈아! 가을이라서 그런 거야, 하며 다른 환자가 거들먹거린다. 말을 꺼낸 당사자가 머쓱해서, “I was just saying! - 그냥 해본 소리야!” 한다. 제3의 사나이가 끼어들어, “왜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하며 볼멘 소리를 낸다. 나는 얼른 묻는다. “Why do we talk? – 우리는 왜 말을 하지?” 로버트가 대뜸 ‘도움을 받기 위해서요’ 한다. 정보를 얻기 위함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구글 검색을 하면 될 텐데? 허기사 정신과 심리상담도 자신에 대..

|컬럼| 242. 꿈, 그 제3의 공간

정신과에서 말하는 자아(ego)는 혹독한 주인 셋을 섬기는 하인이다. 자아는 첫째 본능의 욕구를 들어줘야 하고, 둘째는 현실이 주는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고, 셋째로 양심과 도덕을 들먹이는 초자아(superego)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소시민은 낮 동안 직장에서 이 셋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퇴근하여 한밤중에 까칠한 현실을 떠나서 꿈나라로 도피한다. 수면은 현실로부터의 바캉스다. 열대의 피서지 해변에서 조그만 종이우산을 꽂아 놓은 칵테일을 마시는 쾌적함은 아닐지언정 당신과 나의 두뇌조직은 수면을 취하는 동안만큼은 편안히 쉬고 싶다. 아늑한 꿈의 공간은 직장도 집도 아닌 제3의 공간이다. 그러나 꿈을 꾸는 동안 우리에게 완벽한 휴식은 주어지지 않는다. 기쁜 꿈, 슬픈 꿈, 혹가다 악몽마저 꾸는 우리의 자아..

|컬럼| 423. 007 가방

숀 코네리(Sean Connery, 1930~2020) 주연 007 시리즈 총 7개를 인터넷을 뒤져 다시 본다. 20세기,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인간 발자국을 남긴 1960년대 초반에 시작해서 21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쓴 육중하고, 좀 능글맞고, 배짱 좋은, 본드, 제임스 본드! 제임스 본드 시리즈 처음 4편은 해마다 쉬임 없이 나왔다. ‘살인번호, Dr. No(1962)’,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1963), ‘Goldfinger(1964)’, ‘Thunderball(1965)’. 나머지 세 편은 띄엄띄엄 나왔다. ‘You Can Only Live Twice(1967)’, ‘Diamonds are forever(1971)’, ‘Never Say Never Again (1..

|컬럼| 422. 붙기를 좋아하세요?

예나 지금이나 누구나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붙는 것이 큰 소망이다. 왼쪽 안 주머니에 납작한 엿 덩어리를 품고 입시장에 가던 기억이 난다. 끈적한 엿의 점성(粘性)으로 시험에 붙고 싶은 심정이었다. ‘붙다’는 시험에 붙는 것 외에도 불이 붙다, 붙어 다니다, 이자가 붙다, 싸움이 붙다 등등 그 뜻이 매우 다채롭다. 당신과 나는 남에게 그럴 듯한 별명도 붙여주고 좋은 직장에 오래 붙어있기를 원한다. 붙는다는 것은 대개 좋은 일이다. 낯선 나라에 적응하는데 점점 속도가 붙으면서 타향에 정을 붙이고 사는 재미가 그런대로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마음에 든다. 문화적, 정서적 붙임성이 좋은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남달리 쉽게 정을 붙이는 과정이다. 남녀 간에 정이 붙으면 서로에게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