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76

|컬럼| 398. 실실 쪼개기

제임스가 병동 복도에 서있다가 느닷없이 으흐흐 하며 크게 웃는다. 징글맞고 꺼림칙한 웃음 소리! 아무리 정신질환이지만 이건 좀 심하다. 으흐흐라는 의성어는 영어에 없다. ‘ha ha’가 있고, 산타클로스의 웃음소리인 ‘ho ho ho’가 있을 뿐이다. 하하, 허허, 헤헤, 호호, 후후, 히히, 킬킬, 껄껄, 낄낄, 푸하하, 으흐흐, 으하하, 이히히, 큭큭, 킥킥, 그리고 인터넷 채팅방에 굴러다니는 ‘ㅎㅎ’, ‘ㅋㅋ’ 같은 다채로운 우리말 앞에서 영어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동물 신경과학자, 야크 팽크셉(Jaak Panksepp: 1943~2017)은 2003년에 실험실 쥐의 배를 간질이면 쥐가 크게 웃는다는 사실을 녹음으로 증명했다. 동물도 소리내어 웃는다. 원숭이, 돌고래, 고양이, 개도 당신과 나처럼..

|컬럼| 397. 즘생

쌍말을 잘하는 환자의 차트를 정리한다. 그의 말습관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고 잠시 망설인다. ‘foul-mouthed, 입버릇이 더러운’? 말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하는 판단을 누가 내리나. 내가 과연 언어의 청결과 불결을 판가름하는 사회적 규범의 척도라는 말인가. 환자가 욕설, 저주라는 뜻으로 ‘swear word’를 자주 쓴다고 할까. 화가 나서 ‘내뱉듯이 하는 욕설’이라는 의미의 격식 있는 표현, ‘expletive’는 어떨까. 더 위엄이 넘치는 ‘profane(신성 모독적인, 불경스러운, 욕설적인)’이라는 단어는? ‘profane’은 원래 라틴어에서 ‘out of temple, 사원 밖’이라는 의미였다. 즉, 사원 안에서 쓰는 말은 성스러운 말이면서 사원 밖의 말은 욕설이라는 뜻이 된다. 엘리트주의,..

|컬럼| 229. 너, 당신, 그리고 여보

미국에서 나만큼 오래 살은 대학동기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우리 집'이라 하지 않고 '내 집'이라 말하고서 둘 다 놀란다. 한국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내 와이프 (my wife), 내 나라 (my country) 대신에 우리 와이프, 우리 나라라고 해야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느낌이다. 내 나라? 내가 전 대한민국을 소유하다니. 오, 마이 갓! 할 때도 굳이 소유격을 넣어 번역해서 '오, 내 신이여!' 하기가 조심스럽다. 자칫 신이 내 전유물처럼 들리면 어쩌나 싶어서다. 이것은 '나'를 감추고 '우리' 뒤에 숨으려는 심리작용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더니 미약한 개인의 능력에 반하여 당(黨)은 참으로 막강한 힘을 갖는 법이려니와 우리에게는 생존의 안전과 번영을 위하여 1인칭 단수와 복수를 바꿔 쓸 수 있는..

|컬럼| 395. Stupid is as stupid does

그날 병동환자 그룹치료를 하던 중 그들의 반응을 이렇게 유도했다. -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참 ‘stupid’ 하다고 느끼면서 산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은 바보스러울 때가 많아. 너희들도 살면서 가끔 스스로 ‘stupid’ 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겠지?” 아무도 응답을 하지 않기에 나는 각자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데이비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자기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리처드도 평생동안 ‘stupid’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리처드에게 ‘Really?’ 하며 좀 거세게 다그친다. 그는 잠시 내 눈치를 살핀 후, “But sometimes I feel dumb, you know?” 한다. 평소에 며칠을 말 한마디 없이 지내는 리처드가 이런 말을 하다니! 당신은 본능적으로 ..

|컬럼| 394. 하늘에 사람이 나르샤

병동환자 매튜가 하는 말을 직원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 나 또한 그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다 파악한다. 그의 심중을 눈치로 때려잡는다. 매튜는 자기를 이해하는 나를 좋아한다. 정신과의사는 환자의 말을 귀담아듣는 일이 천직이다. 환자가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 냉정한 평가를 내리면서 무슨 말을 하는가, 하는 내용(content)보다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형식(form)에 더 신경을 쓴다. 폼생폼사다. 말이 즉 생각이다. 말의 형식이 일반인들과 크게 어긋나는 경우에 ‘formal thought disorder, 형태적 사고장애’라는 전문용어를 쓴다. 바쁜 세상에 사람들 간에 오고 가는 의사소통은 일단 구색만 갖추면 너끈히 통한다. 말은 ..

|컬럼| 393. 유니콘의 사랑

딸이 한참 어릴 적에 ‘The Last Unicorn, 마지막 유니콘’이라는 만화영화를 함께 본 적이 있다. 마법의 축복으로 평온한 숲에 살던 유니콘은 어느 날 자기가 마지막 남은 유니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니콘들의 아름다움을 독점하기 위하여 해거드 왕이 붉은 황소(Red Bull)를 시켜 바다 속에 모든 유니콘들을 감금했기 때문이다. 해변 드높은 성에서 흰 물거품 파도에 휩쓸리는 그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사는 킹 해거드! 유니콘은 친구들을 찾아 나선 길에서 마술사 슈멘드릭(Schmendrick, 유대어의 분파 이디시말로 ‘바보’라는 뜻)을 만난다. 산적들에게 잡혔다가 탈출한 둘의 여행길에 두목의 아내, 몰리(Molly)가 합세한다. 일행은 레드 불의 공격을 받는다. 슈멘드릭은 유니콘을 보호하기..

|컬럼| 222. 과도기 현상

옛날 어릴 적 살던 집 담 밖에 우뚝 선 전봇대 꼭대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끊임없이 났었는데 어른들은 그것을 '도란스' 소리라 했다. 그것은 강력한 전압을 가정집 수준에 맞게 낮추는 'transformer (변압기)' 소리였는데 그 단어의 첫 부분만 따온 일본식 영어발음이었다. 그 '도란스'가 'transport(옮기다)', 'transit(운송)', 'transition(과도기)' 같은 낱말의 시작 부분이라는 것 또한 한참 뒤에 알았다. 'trans'에는 가로지른다는 동작감 외에도 변화, 변천 같은 추상적인 의미가 숨어있다. 'transport'는 중세 불어와 라틴어에서 무엇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긴다는 뜻이었고 16세기 초에는 '감정에 압도당하다'라는 의미도 생겨났다. '당하다'라는 말이 속수무..

|컬럼| 392. 마네킹

우연히 인터넷에서 구석본(1949~)의 시, “마네킹의 눈물”을 읽었다. (시로 여는 세상, 2018년 여름호) 얼굴을 뭉개버렸다 눈을 지우고 코를 지우고/ 입조차 깨끗이 뭉개버린 다음/.. 하며 시작했다가 나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 뜻밖에도 당신,/ 나 아닌/ 당신의 원형이 떠오른다.//.. 실로 감동 어린 부분이다. 점포를 닫는 상가의 쇼윈도 바닥에 마네킹이 반질반질한 맨몸으로 팽개쳐 있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마네킹은 눈을 빤히 뜨고 옆으로 누워 있었는데 나는 마네킹이 속으로 울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시인은 얼굴이 뭉개진 사람 모양의 물체를 과학적 시선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시인은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보는 재능을 발휘하여 모종의 신비한 메커니즘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시인..

|컬럼| 391. 고흐를 동정하다

-- There is peace even in the storm. (Van Gogh) – 평온은 심지어 폭풍 속에도 있다 (고흐) 한 미약한 인간은 인정사정없는 폭풍의 괴력을 맞닥뜨리지 못한다. 열악한 현실에서 한 가닥의 평온을 구가하는 향취가 전해지는 고흐(1853~1890)의 짧은 명언을 곱씹는다. 폭풍이 거창하고 사나운 객관이라면 평온은 한 개인의 희망사항과 의지가 깃들어진 주관이다. 객관과 주관을 이렇게 갈라놓는 내 의도는 환경이라는 외부상황과 평온이라는 내부상태와의 상호관계를 조명하는데 있다. 고흐는 37살의 아까운 나이에 권총 자살로 힘겨운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정신질환에 대하여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의견을 피력한다. 정신분열증, 조울증, 간질, 알코올 중독, 성격장애 같은 굵직굵직한 병명들이..

|컬럼| 390. Crying in H Mart

당신과 내가 조그만 빨가숭이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말을 깨우치고 학교에서 글을 배우며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롭기만 하다. 사람의 발육과정에서 무엇이 잘못 됐을 때 일어나는 크고 작은 고통과 고난을 어찌하면 좋을까 싶다. ’Michelle Zauner’의 ‘Crying in H Mart, H마트에서 울다’를 읽으면서 가슴이 연거푸 찡하고 울컥거렸다. 이 회고록은 2021년 4월 20일 출간된 후 뉴욕 타임즈 논픽션 베스트 셀러 목록에서 한동안 2위를 차지했다. 미셸 자우너는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올 32세된 록싱어(rock singer). ‘H Mart’는 미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한국 그로서리 ‘한아름 마켓’이다. 미셸은 서울에서 출생 후 한 살때부터 오리건 주의 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