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79

|컬럼| 479. 똥꿈

똥꿈 신라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오줌 꿈’을 꾼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보희가 산 위에서 배설한 오줌이 엄청난 분량으로 서라벌 땅을 적시는 꿈이다. 동생 문희는 비단치마 한 벌을 언니에게 건네주고 그 길몽(吉夢)을 산다.  문희는 오빠 김유신의 계략으로 선덕여왕 왕실의 고위급 인사 김춘추와 여차여차하여 정을 맺는다.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그와 혼인하여 7세기 중반에 왕비가 된 문희는 언니의 꿈을 매입하고 팔자를 고친 셈이다. 그룹 세션. 간밤에 똥을 만지는 꿈을 꿨다고 한 환자가 밑도 끝도 없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한다. 꿈은 속뜻과 겉 뜻이 반대일 경우가 많다고 했지. 우리의 무의식은 겉과 속이 반대일 때가 많다니까. 한국의 민속신앙에서 ‘똥꿈’은 재운(財運)을 예고하는 꿈이기 때문에 한국인..

|컬럼| 430. 멘붕(Men崩)

병동환자 브루스가 틈만 생기면 주장한다. “I am not mental.” - 표준영어로 “I am not mentally ill.” 할 것을 줄여서 하는 말. 자기는 정신병이 없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병동에 체류할 이유가 없으니까 어서 퇴원을 시켜달라는 압력이다. 병원 말고 딱히 살 곳이 없을 뿐더러 설사 있다 치더라도 이런 식으로 강짜를 부리는 환자를 받아주는 시설이나 프로그램은 없다. 그도 나도 ‘멘붕’이 일어날 정도다.멘붕은 브루스가 떠들어대는 ‘mental’의 ‘men’과 붕괴(崩壞)의 첫 자의 합성어로서 2000년대부터 한국에서 유행한 말이다. 2012년에 그해 최고의 유행어로 뽑혔다. 정신이 무너지고 깨진다는 뜻. 실성했다, 정신줄이 나갔다, 심하게는 미쳤다는 표현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영..

|컬럼| 373. 달 빨아들이기

아프리카 마사이족은 인사할 때 상대방 얼굴에 침을 뱉는다. 물이 귀한 건조지대에 살면서 서로에게 수분을 전해 주는 습관이란다. 결혼식에서도 하객들이 삥 둘러서서 신부에게 성심성의껏 침을 뱉는다. 마사이 족의 해와 달에 대한 신화가 있다. - 사소한 일로 남편인 해가 아내인 달을 때린다. 달이 덤벼들어 해의 얼굴을 할퀸다. 해는 달의 얼굴에 수많은 상처를 입히고 한쪽 눈알을 빼 버린다. 남성우월자 해는 자기의 흉한 꼴을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더 강렬하게 빛을 내뿜는다. 눈이 부셔 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남들에게 그의 체통은 유지된다. 달은 상흔을 감추는 기색도 없이 밤하늘을 마냥 은은하게 밝혀준다. 이 신화가 마음에 든다. 인사법만큼이나 기존관념을 깬 사고방식에 매료된다. 해는 가까이하기에 무섭고 두..

|컬럼| 158. 눈치 코치

'hunch'는 워낙 15세기경 '튀어나오다' 혹은 '돌출하다'는 말이었고 나중에 어깨나 등을 활처럼 구부린다는 뜻이 됐다. 등허리가 튀어나왔다 해서 꼽추를 'hunchback'이라 한다. 그러던 'hunch'가 1904년부터는 '예감'이라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어떤 예감이 떠 오를 때 생각이 한쪽으로 쏠리거나 튀어나오는 모양이다.  'hunch'는 송이, 뭉치 또는 다발을 일컫는 'bunch'와 말 뿌리를 같이한다. 해리 벨라폰테의 히트곡 '바나나 보트 송'의 중간부분에 "Six foot, seven foot, eight foot BUNCH!" 하는 바로 그 'bunch'도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나나를 다발로 묶어 놓은 자마이카의 야간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다. 그들이 아침 해가 밝아오자 ..

|컬럼| 478. 혼동

어릴 적에 혼동과 혼돈의 뜻이 곧잘 헷갈렸다. 서로 발음이 비슷해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도 좀 그렇다.  네이버 사전은 ‘혼동(섞을 混, 같은 同)’을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뒤섞어서 보거나 생각함’, 그리고 ‘혼돈(섞을 혼, 막힐 沌)을 ‘마구 뒤섞여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이라 풀이한다. 영어로 혼동은 ‘confusion’. 혼돈은 ‘chaos’. 이 두 말은 발음이 서로 생판 다르기 때문에 뜻이 섞갈리지 않는다.  요컨대 혼동과 혼돈은 뒤섞거나 뒤섞이는 것이 문제다. 불고기, 상추, 고추장, 등등을 숟가락으로 뒤섞어 비벼먹는 비빔밥은 별로 열띤 토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을 비빔밥 먹는 식으로 하는 사람은 생각이 부실하다는 말을 듣는다. 오늘 그룹세션 타이틀은 ‘confu..

|컬럼| 477. 경우

정치평론 위주의 유튜브를 보며 한국말 쓰임새를 배운다. 귀가 닳도록 ‘누구누구 같은 경우’라는 말을 듣는다. 이를테면, ‘홍길동은…’ 하는 대신에 ‘홍길동 같은 경우에는…’하는 표현을.  홍길동은 사람이 아니라 ‘경우’다. 홍길동이 유일무이하지 않고 홍길동 ’같은’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암시다. 개별성은 없고 동질성만, 개인은 없고 단체만 존재한다는 사고방식, 소신 있고 개별적인 정치가는 없고 당에 충실한 당원(黨員)만 있다는 식이다. 우리 ‘DNA’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대인기피증의 소치일까. 상대의 ‘first name’을 부모가 자식 이름을 부르듯 불러대는 미국적 말습관에 반하여 우리는 성명(姓名, full name) 뒤에 직함을 꼭 부친다. 이를테면,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대표! 성씨(姓氏, la..

|컬럼| 476. 익숙하다니

익숙하다는 말이 한자어인 줄 알았다. 아니다. ‘익熟’은 순수 우리말과 한자의 혼성어다. (熟: 익을 숙)  ‘익다’는 열매, 씨가 여물거나, 고기, 채소, 곡식 따위의 날것이 뜨거운 열을 받아 그 성질과 맛이 달라지거나, 김치, 술, 장 따위가 맛이 든다는 뜻이라 사전은 풀이한다. ‘익숙’은 해변가, 처갓집처럼 같은 뜻을 두 번씩이나 반복하는 낱말이다. ‘익다’에는 ‘자주 경험하여 서투르지 않다’, ‘여러 번 겪어 설지 않다’는 뜻이 있다. 충분히 익지 않은 상태를 ‘설익다’라 하고 낯설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낯이 익숙하지 않다는 의미. ‘설다’도 순수 우리말로서 ‘익다’의 반대말. ‘설날’은 새로운 해의 첫날이 낯설은 날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위키백과는 해명한다. 설날은 설익은 날. 해묵은 날이 아..

|컬럼| 475. 욕

사이버스페이스를 드나드는 지구촌 사람들이 욕을 하는 성향에 대한 통계를 읽는다. 뉴욕 포스트는 미국내에서 가장 욕을 자주하는 사람들이 뉴요커가 아니라며 실망스러운 기색을 보인다. 1등은커녕 17등으로 밀린 뉴욕 시티. 영화에서 자주 보는, 말끝마다 욕을 쏟아대는 맨해튼 거리의 풍경은 터무니없는 과장이라는 판명이다. 2024년 8월에 1000명의 온라인 트위터 메시지를 대상으로 한 집계를 따르면 미국에서 욕을 제일 잘하는 도시는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라는 것. 볼티모어는 선원들이 많이 사는 항구다. 뱃사람들은 워낙 바다에 대한 공포심에서 욕을 잘한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네이버 사전은 욕(辱)이라는 한자어를 이렇게 풀이한다. ➀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 남을 저주하는 말. ➁아랫사람의..

|컬럼| 19. 우리집 옆집 도둑괭이가

영어 슬랭에 고양이가 자주 나온다. 우리말 속어에는 ‘여우'가 더러 등장하지만 고양이는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간단하게 대충 물만 찍어 바르는 세수를 ‘고양이 세수'라고 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라는 뜻으로 ‘There's more than one way to skin a cat (고양이 껍질을 벗기는 방법이 하나 둘이 아니다.)’라는 속어가 있다. 양키들이 예상 외로 시치미를 뚝 따고 쓰는 표현인데 그 때마다 말하는 사람의 안색을 잘 살펴보면 고양이의 야들야들한 살갗을 벗기는 따위의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고양이가 들어가는 영어 속담을 조사해 보자. ‘Curiosity killed the cat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였다.)’ 즉, 호기심이 너무..

|컬럼| 474. 과거애착증

우리는 왜 어둡고 괴로운 과거에 매달리는가. 당신은 숱한 과거의 기억 중 어찌 그리도 아프고 슬픈 과거에 집착하는가. 따스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활짝 웃으며 ‘Happy Birthday to You~♪’ 하며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입을 모아 노래하던 즐거운 메모리 등등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인가.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케네디 공항에 항공기가 안전하게 착륙하는 일상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어느 날 비행기가 추락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서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는 뉴스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일제히 쏠리지요. 나는 허전한 생일파티 등등보다 잘못하면 나의 안전이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에 조마조마해집니다. 자기보존본능은 모든 생물체의 생존을 위한 기본여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