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76

|컬럼| 389. 신(神)들의 논쟁

브루스가 내게 말한다. “나는 당신이 어떤 정신과의사인지 모르기 때문에 당신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내가 신에게 몇 번을 직접 물어봤는데 당신이 처방하는 정신과 약은 백해무익이니까 절대로 먹지 말라 하더라.” 그는 얼마 전 다른 병동에서 내 병동으로 후송된 60대 중반의 백인남자다. 말의 앞뒤관계가 크게 어긋나지 않아서 어느 정도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속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관계다. 요컨대 그와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나 의견교환은 정상인을 자처하는 당신과 내 대화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음을 느슨하게 먹고 물어본다. “나는 나 대로 신봉하는 신이 있다. 난처하게도 내 신은 브루스라는 환자를 잘 보살피고 약 처방도 최선으로 잘 하라고 당부하더라. 너의 신과 나의 신이 의견을 달리..

|컬럼| 388. 외로움

며칠 전부터 집 밖 어디선지 간간 꾸르륵, 꾸르륵, 터키 우는 소리가 들린다. 꼭 누구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 매해 이맘때면 그러려니 하면서도 올해는 유독 크게 들린다. 창밖에 서너 살짜리 어린애 정도 키의 터키가 서성이고 있다. 턱밑 벼슬이 불그스레하다. 그는 집 뒤뜰 아주 가까이에서 내 서재 쪽으로 발길을 재촉하려고 벼르는 모양새다. 나를 정면으로 보면서 가만히 서있기도 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360도로 사방을 살피면서 약간씩 앞뒤로 흔든다. 사나운 발톱으로 풀섶을 파헤친다. 땅에 날카로운 키스를 퍼붓다가 머리를 천천히 드는 동작이 나를 친구로 삼고 싶은 기색이다. 흡족하게 따뜻하지 못한 봄바람 속에서 터키 한 마리가 내 뒤뜰을 노닐고 있다. 많이 외로워 보인다. 어릴 적 하모니카를 배울 때 처..

|컬럼| 387. 세 개의 시계

“I have two watches. I always have two. One is on my wrist and the other one is in my head. It’s always been that way. - 나는 시계가 둘이야. 늘 둘이 있어. 하나는 손목에 하나는 머리 속에 있지. 항상 그래 왔어.” 2021년 2월에 개봉된 앤서니 홉킨스 주연 ‘The Father’에 나오는 앤서니가 하는 말이다. 왠지 애처롭다는 느낌이 엄습한다. 실재하는 손목시계와 머리 속에서 망가지고 있는 시간개념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치매환자의 극중 이름도 앤서니다. 한국에서도 4월 초에 개봉된 영화다. 고심 끝에 타이틀을 ‘아버지’라 번역하지 않고 그냥 ‘더 파더’라 옮긴 것이 흥미롭다. 84살의 앤서니 홉킨스의 소스라..

|컬럼| 386. 꿈을 위한 3중주

1. 참된 거짓말 -- 정신병의 갑옷이 당신의 영혼을 보호한다 든든해 아주 든든해요 반달이 내게 미소를 보내기 전, 멀리서 아주 멀리 작은 새 여럿이 떼를 지어 날아갑니다… 「꿈에 대한 보충설명」 (2018) 재미난 꿈을 꾸었다고 당신이 말한다. 궁금해서 몇 마디 물어봤더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자꾸만 눈을 깜박이는 모습이 무언가 짐작해서 말하려는 눈치다. 애써 하는 보충설명은 진실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듣는 사람을 염려하다가 솔직한 말을 하지 못한다. 어느덧 당신의 말은 ‘프레젠테이션’이 된다. 허위와 과장이 개입된다.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직설을 한다. 그러나 적나라한 표현이라고 다 진실은 아니다. 내면적 따스함이 정확한 지적보다 더 진실에 가..

|컬럼| 313. 꿈에 대한 보충설명

당신이 내게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한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Interpretation of dreams, 1899년 출간)’이 가르쳐준 몇 가지 원칙을 추종하는 정신과의사로서 나는 좋은 음악에 심취하듯 당신 꿈의 내용에 몰입한다. 꿈의 내용에는 ‘드러난 내용(manifest content)’과 ‘감춰진 내용(latent content)’이 있다. ‘드러난 내용’은 거죽으로 나타나는 사실적 요소다. 당신은 꿈에 어느 버스 정거장 벤치에 홀로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한 모르는 남자가 우산을 들고 당신 쪽으로 걸어온다. 방금 열거한 사실적 진술이 드러난 내용의 좋은 본보기다. 드러난 내용은 수박 겉핥기 식의 내용이다. 당신의 행선지가 어디였는지, 그 정체불명의 우산 든 남자가 어떤..

|컬럼| 385. 봄

회의 시작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무료하게 앉아있던 직원이 올해는 3월 14일에 서머타임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시계 바늘을 앞으로 당기는지 뒤로 돌리는지 헷갈려, 하며 투덜댄다. 그거 ‘March forward, fall back, 3월은 앞으로, 가을은 뒤로’ 아니야? 하고 내가 말하자, ‘Spring forward, fall back, 봄은 앞으로, 가을은 뒤로!’ 하고 누가 잽싸게 교정해 준다. 3월에 시간을 바꾸자니까 그런 말이 튀어나왔나? 3월 대신에 행진(march)이라는 컨셉에 몰두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영어로 3월과 행진은 같은 단어다. 내가 그렇게 말한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근래에 입에 붙은 ‘move forward’라는 관용어가 나를 순간적으로 장악한 것이다. 회의 도중 토의가 ..

|컬럼| 262. 사랑과 공격

뉴욕 코넬 의과대학의 오토 컨버그(Otto Kernberg: 1928~) 밑에서 정신과 수련의 과정을 밟은 것은 내 직업 인생에 있어서 1970년대 중반에 터진 커다란 행운이었다. 현재 컨버그는 성격장애(Personality Disorder)의 진단과 치료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그는 우리 시대에 점차로 쇠잔하는 정신분석학에서 내가 존경하는 마지막 자이언트다. 체질적으로 언어에 지독한 관심을 품은 나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약이나 수술보다 말을 사용하는 기법에 심하게 심취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란 상대의 마음을 보듬어 파고드는 행위이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고도의 기술과 경험을 요구한다. 마음이 마음을 치료한다는..

|컬럼| 384. 비겁한 처방

입원환자 약의 복용량을 놓고 다른 정신과의사와 회의석상에서 토론이 벌어진다. 의사들의 처방습관에도 어쩔 수 없이 각자각자의 성격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토론이 논쟁으로 변한다. 약의 효능보다 부작용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변론이 나온다. 어차피 아무리 약을 써도 증상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 것이 ‘정신분열증’이니까 아예 미리부터 약의 부작용이나 방지하자는 속셈이 내보인다. 적극적으로 병의 증세를 호전시키는 약물투여는 관심 밖이다. 나는 2010년부터 한국에서 통용되는 ‘조현증’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못하다. 사람 뇌의 신경구조가 현악기가 아닌 이상 조현(調絃)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올들어 어느덧 46년째 정신과의사로 일하고 있지만 정신분열증이 뇌질환이라는 단정을 내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환자의 두뇌장애..

|컬럼| 383. 옷 벗는 사람들

코로나 백신으로 지구촌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2021년 2월에 한국 소식을 듣는다. 얼마 전 한 장관이 옷을 벗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 추운 겨울에 옷을 벗다니. 동상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옷을 벗는다는 말은 어떤 지위에서 물러난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옷만 벗는 것이 아니다. 안경도 벗고, 마스크도 벗고, 베일을 벗고, 누명을 벗고, 때를 벗는다. 벗는 양상도 헐벗다, 벌거벗다, 빨가벗다, 등등 그 뉘앙스가 다채롭다. 앞뒤 가리지 않고 함부로 날뛰는 사람을 일컫는 ‘천둥벌거숭이’도 재미있는 말이다. 우리는 참 벗기를 좋아한다는 논리의 비약이 가능하다. 왜 그럴까. 다혈질이라서? 병동환자가 이유 없이 옷을 벗고 알몸으로 복도를 서성거릴 때가 있다. 직원이 황급히 시트로 몸을 가려주면 순순히 자기 방에 가서..

|컬럼| 382. 알파 메일

눈 내리는 일요일 오후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원숭이에 대한 동영상을 보았다. 송곳니가 길게 뻗은 짧은 꼬리 원숭이(macaque monkey) 한 마리가 무리의 우두머리(the alpha)에게 왕위 찬탈을 위하여 사납게 덤벼든다. 무뢰한은 우두머리에게 패배하고 초라하게 추방당한다. ‘alpha monkey’는 수년간 관계를 다져온 충복들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공격력을 과시해준 덕분으로 싸움에서 이긴다. 원숭이도 원맥(猿脈)이 좋아야 왕권이 유지되는 법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당신과 나는 처음을 우선시하고 마지막을 피하려고 애쓴다. 그래서인지 ‘처음처럼’이라는 소주 이름이 꽤 호소력이 있다. ‘알파, alpha’는13세기에 히브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