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79

|컬럼| 332. 통찰력

‘insight’는 사전에 ‘통찰력’이라 나와있다. 지금껏 이 정신의학 용어를 ‘안식(眼識)’이라 우리말로 옮기면서 나는 미국에서 정신과의사로 일하고 있는 참이다. ‘insight’는 통찰력이라 하지 않고 ‘속 모습’, 혹은 유식한 한자로 ‘내부시력(內部視力)’이라 하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자기만의 속 세상이 있다. 수박 겉핥기 식의 껍데기보다 숨겨진 진실이 더 중요한 사람들에게 ‘insight‘를 ‘속 모습’이라 옮기면 훨씬 좋은 번역이 아닐까? ‘in(속)+sight(모습)=참 모습’이라는 등식이 너끈히 성립된다. ‘insight’에 대하여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치듯 환자들에게 대화식으로 강의를 했다. 인사이트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볼 줄 아는 능력이라고 내..

|컬럼| 330. 불

2019년 1월 찬 바람 몰아치는 어느 밤에 얼토당토않게 당신 집에 전기 누전 때문에 불이 나는 가상현실을 연출해 볼까 한다. 매연 때문에 갓 잠에서 깨어난 당신은 현관 문을 뛰쳐나와 떨리는 손가락으로 핸드폰에 911을 찍어 누른다. 이윽고 뉴욕 근교 소도시를 관할하는 소방차 여러 대가 경적 소리 요란하게 겨울 밤을 뚫고 들이닥친다. 불 소식을 들은 자식들과 친지들이 그런 일은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며 머뭇머뭇 말문을 터뜨린다. 보험회사와 수십 통의 전화통화가 이루어지고 현장에 출두한 회사 직원들과 눈살을 찌푸리며 대화를 주고받는 나날이 강물처럼 유유하게 흘러간다. 집을 다 때려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 한다고 한 전문가가 어두운 표정으로 선언한다. 그렇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화재다. 물과..

|컬럼| 329. 무서운 피터팬, 그 매정한

“한 아이를 제외하고 어린애들은 모두 자란다. 그들은 일찍이 자기네들이 자란다는 것을 알고 웬디도 그걸 알았다. 그녀는 두 살 때 어느 날 정원에서 꽃 한 송이를 꺾어 들고 엄마한테 뛰어간 적이 있다. 엄마는 가슴에 손을 얹고 '오, 네가 영원히 지금 같았으면!' 하며 소리쳤다. 이것이 모녀 사이에 꽃을 두고 생긴 일의 전부였지만 그때 웬디는 스스로 자라야 된다는 것을 깨달었다. 당신도 두 살이 넘으면 기어이 그걸 알게 된다. 두 살은 끝의 시작이다.” 피터팬의 첫 문단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번역해 보았다. 시(詩)와 이야기는 시작 부분에서 전체의 흐름과 윤곽을 암시한다.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아이로 알려진 피터팬은 절대로 성장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여러 번 밝힌다. 피터팬은 사실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다. ..

|컬럼| 323. 세 개의 벽

환청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묻는다. 정체를 모르는 목소리, 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여럿이 토론을 하다가 의견충돌을 일으키는 목소리들, 더구나 남을 해코지 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그들의 압력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고 묻는다. 환자가 대답한다. 목소리에게 대들기도 하지만 대개는 못들은 척 한다는 것! 심지어 목소리가 시키는 일이 있으면 그러겠다 해 놓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는 것! 이 환자는 목소리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내부 상황과 벽을 쌓고 지낸다. 그 벽은 혼동과 선동을 불러 일으키는 악의에 찬 자극을 차단한다. 한 국가로 치면, 이것은 외적의 침입이 아니라 질이 나쁜 내부 세력이 난동을 일으키는 정황이다. 이 사악한 내부 자극이 끝내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숙이게 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