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좋은 집에 사는 박사장 가족과 반지하에서 사는 김씨 가족은 처음에 서로 공생(共生)하는 관계였다. 김씨 가족 전원은 박사장 집에서 일하는 어엿한 피고용인들이었다. 한쪽이 다른 쪽에 빌붙어 기생(寄生)하는 관계가 전혀 아니었다.
박사장 저택의 어두운 비밀 지하실에는 가정부의 남편이 숨어서 오랫동안 무위도식하고 있다. 좋게 말해서 그는 식객(食客)이다. 밉던 곱던 한 사람을 기생충(寄生蟲)이라고 벌레 취급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무리다.
2020년 2월 9일에 ‘기생충’이 오스카 상 역사상 외국영화로는 최초로 작품상을 받았다는 소식이다. 자랑스럽다. 봉준호 감독은 수상소감에서 미국의 노장 감독 마틴 스콜세지의 명언을 인용한다. –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인 것이다. (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기생충, 하면 학교에서 주는 구충제를 먹은 다음날 선생님이 회충이 몇 마리 나왔냐고 물어보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내 손가락만 한 굵기의 샛노란 지렁이가 남들보다 몇 마리 적게 나왔기 때문에 속상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 역겨운 충격요법을 쓴 봉준호의 승산이 맞아 떨어진 것이 흥미롭다. 역시 말의 마력은 연상작용에 있는 게 아닌가 싶지.
‘parasite, 기생충’은 16세기 초에 라틴어와 고대 불어에서 기식자(寄食者)라는 말이었다. ‘para’, ‘옆’이라는 접두어와 빵이라는 뜻의 ‘sitos’와 합쳐진 단어란다. 즉, 옆에서 빵을 먹는 사람, 식객이라는 의미였다. 손님? 가축, 곡식, 사람에 기생하는 벌레라는 뜻은 좀 나중에 생겨났다.
김씨네 가족, 아버지 송강호, 어머니 장혜진, 아들 최우식, 딸 박소담은 치열한 현실감각과 팀워크로 삶을 헤쳐 나가는 작업에 몰두한다. 박사장 가족은 몽상적인 정서와 부유한 현실을 수시로 왕복할 수 있는 특권 말고는 딱히 어디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지하실의 식객, 기생충이 지상으로 올라와 박사장의 딸을 죽이고 송강호는 자기 몸에서 나는 중산층 냄새를 싫어하는 박사장이 싫어서 그를 죽인다.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따라서 이 세 가족은 엄연한 상징계(the Symbolic), 몽롱한 상상계(the Imaginary) 그리고 본능적인 실재계 (the Real)가 삼위일체로 얽히고 설키는 심한 갈등을 일으킨다. 이 국면에는 악인도 선인도 없고 따분한 권선징악의 교훈은 더더구나 없다.
봉준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 사실 정확한 악당은 없어요. 진짜 악당은 없는데 끝에 가서는 대개 무서운 일이 터지잖아요. 그 이유가 뭘까. 그게 사실 대개 슬픈 부분인데…”
기생충이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를 그린 영화라고 논평하는 기사를 읽는다. 빈부의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된다는 정치적 발언이 우렁차게 울린다. 이 영화가 큰 파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이때가 때다 하며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의도가 남사스럽다.
영화 끝부분에서 아들 최우식이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서 아버지 송강호가 지하실에 갇혀 있는 박사장 집을 열심히 돈을 벌어서 사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장면이 눈물겹도록 인상적이다.
위대한 정부가 군림하여 불평등한 사회를 다림질하듯 판판하게 짓눌러서 빈부의 격차를 없애 주기를 넋없이 바라기보다는 이 번잡한 자본주의라는 상징계에 뛰어들어 죽도록 애를 쓰겠다는 튼튼한 결의와 젊은 에너지의 발현에 경의를 표한다. 가장 개인적인 노력이 가장 창조적인 결과를 자아내는 것이다.
© 서 량 2020.2.23
--- 뉴욕 중앙일보 2020년 2월 26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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