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85

|컬럼| 360. 워리

2020년 4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처하는 뉴욕 의료인들이 고초를 겪고 있다. 약사, 슈퍼마켓 종업원, 배달업자, 의사같은 직업은 재택근무를 할 수 없는 직종이다. 차가 몇 대 안 보이는 유령 도시의 고속도로를 나 또한 매일 질주한다. 병동 직원들은 마스크를 쓰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은 환자들의 민낯이 편안해 보인다. 한 직원이 부럽다는 듯이 투덜댄다. “They are not anxious at all” - 저들은 도무지 걱정을 하지 않네요. ‘anxiety(걱정, 두려움)’, ‘anguish(고민)’, ‘anger(분노)’처럼 ‘앵~’으로 시작되는 말은 전인도유럽어에서 좁고, 답답하고, 옥죄인다는 뜻이었다. 노여워서 토라진다는 뜻의 ‘앵돌아지다’라는 우리말도 ‘앵’자 돌림이라고 당신이 주장한다면 그 또..

|컬럼| 359. Social Distancing

인적이 끊어진 이탈리아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할 뿐, 배경음악이 없는 화면진행이 한동안 지속된다. 한 사람이 방에서 입을 꾹 다물고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이 이어진다. 2020년 3월 어느 주말,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대신 나는 티브이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전 세계에 창궐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독 이탈리아만을 집중적으로 강타하고 있다. 지구상 모든 국가중 이탈리아의 사망율이 최고치로 9.5 퍼센트.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들 열 명중 거의 한 명이 죽는다는 통계가 섬뜩한 현실로 우리를 엄습한다. 중국은 일찌감치 질병이 발생한 원조이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미국이 버럭버럭 소리치며 울부짖는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바이러스의 숙주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에 뵈지 않는 바이러스를 경계하고 회피하려..

|컬럼| 358. 마스크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걸어간다. 젊은 여자, 은퇴한 대학교수, 급하게 라면을 먹고 편의점을 나온 대학생, 정치적 이념이 강한 중년 남자, 또는 겁 없는 무신론자들이 제각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걸어간다. 마스크는 2020년 3월 현재 중국 우한이 발원지로 알려진 코로나 바이러스의 침투를 막아내는 방패막이다. 마스크는 투구를 쓴 고대의 병사들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적군의 화살을 막으려고 방패로 몸을 가리는 자기방어 메커니즘이다. 마스크는 절대절명의 구명책이다. 마스크는 은성한 가장무도회에 참가하는 소박한 가면이다. 마스크는 자신이 포식동물의 먹거리가 아니라는 시그널을 할로윈데이 가면의 무서운 이미지로 전달한다. 마스크는 포식성이 강한 상대방을 혼동에 빠뜨려서 내 안전을 꾀하려는 방어..

|컬럼| 357. 가장 개인적인 것

영화 ‘기생충’! 좋은 집에 사는 박사장 가족과 반지하에서 사는 김씨 가족은 처음에 서로 공생(共生)하는 관계였다. 김씨 가족 전원은 박사장 집에서 일하는 어엿한 피고용인들이었다. 한쪽이 다른 쪽에 빌붙어 기생(寄生)하는 관계가 전혀 아니었다. 박사장 저택의 어두운 비밀 지하실에는 가정부의 남편이 숨어서 오랫동안 무위도식하고 있다. 좋게 말해서 그는 식객(食客)이다. 밉던 곱던 한 사람을 기생충(寄生蟲)이라고 벌레 취급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무리다. 2020년 2월 9일에 ‘기생충’이 오스카 상 역사상 외국영화로는 최초로 작품상을 받았다는 소식이다. 자랑스럽다. 봉준호 감독은 수상소감에서 미국의 노장 감독 마틴 스콜세지의 명언을 인용한다. –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인 것이다. (The mos..

|컬럼| 356. 귀신 이야기

스칼렛 요한슨과 최민식이 열연하는 2014년 영화 ‘루시’를 기억하시는가. 오랜 진화과정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아직 두뇌의 10%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추정에서 갈등이 펼쳐지는 사이파이 영화를. 그녀는 두뇌기능을 향상시키는 약 봉지를 강제로 몸에 수술로 삽입 당한 채 약을 운송 한다. 그리고 사고가 터져서 몸속 비닐 봉지가 파열하여 두뇌활동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악당 최민식에 강렬하게 대항하는 그녀는 두뇌의 사용영역이 점점 확장되면서 초능력이 나타난다. 두뇌의 40%가 기능을 발휘할 때 그의 생각을 읽고, 60%를 넘자 악당들의 공격을 생각만으로 제어하고, 나중에는 과거와 현재를 앉은 자리에서 두루두루 살펴보는 신비한 힘이 생긴다. 시공을 초월하는 능력! 불교의 6신통(神通)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컬럼| 355. 쾌지나 칭칭 나네 ~♪

‘쾌(快)’라는 발음하기 힘드는 우리말에 대하여 생각한다. 쾌청, 쾌적, 쾌차 같은 기분 좋은 말들이 떠오른다. 쾌락, 쾌감, 쾌재, 쾌속도 있다. 그런가 하면 상쾌, 유쾌, 흔쾌, 통쾌, 경쾌, 완쾌, 명쾌, 하는 식으로 말끝에 붙는 쾌자 돌림은 왜 그리 많은지. 이런 단어들은 다 한자어다. 순수한 우리말로는 즐거움, 기쁨, 시원함이 고작이라서 별로 다채롭지 못하다. 중국인들에 비하여 체질적으로 우리의 정서가 단순하기 때문일까. 정신분석에서 인간의 행동원칙을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과 현실원칙(reality principle)으로 나눈다. 전자는 타고난 본능에 가깝고 후자는 자연환경과 사회적 압력에서 비롯된다. 쾌락은 질서를 무시하고 현실은 질서를 강요한다. 쾌락이 아이들 마음 속에..

|컬럼| 354. 용감한 사람들

짐짓 신선한 마음으로 그룹 세션을 시작한다. 이제 새해도 됐으니 혹시 새해 결심을 한 사람이 있느냐, 하며 좌중을 둘러본다. 이런 추상적인 질문에 결코 자발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는 병동 입원 환자들이다. 우리는 매해 정초를 맞이하면 왜 새삼스레 어떤 결심을 하는가. 옛날 옛적, 자그마치 4000여년 전 바빌론 사람들은 해가 바뀌면 남에게 빌린 돈을 갚고 빌린 물건을 돌려주겠다고 신에게 약속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새해 결심은 종교적 관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당시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주름잡던 바빌론 사람들에게 있어서 새해 결심은 지키지 않으면 큰 벌을 받는 신과의 언약이었다. 자기 스스로와의 약속이 아닌 엄청나게 무서운 외부적 존재와의 계약이었다. 인류가 자아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근세에 발생한..

|컬럼| 353. Name Your Poison!

약(藥)이라는 한자어를 살펴본다. ‘풀 초’ 밑에 ‘즐길 락’이 합쳐진 모습! 풀을 즐긴다고? 영어 슬랭으로 ‘weed, 잡초’라 하고 우리가 대마초라 부르는 마리화나가 떠오른다. 미국에서 오래 살아온 탓이다. 약에는 의약(醫藥)이라는 뜻 말고 독(毒)이라는 뜻도 한자사전에 나온다. 대마초를 피우면 당장은 릴랙스 할지 모르지만 정신건강에는 독이 된다. 당신 아들이 시험준비를 해야 할 시간에 대마초를 피우면서 편안한 기분에 빠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1960년대에 전 세계를 흔들었던 팝송 ‘Love Potion No. 9’을 기억하는가. ‘사랑의 묘약’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노래. 이때 ‘potion’은 ‘물약’을 뜻한다. 제목을 ‘사랑의 드링크제’라 하면 어떨까. ‘potion’과 ‘poison(독약)..

|컬럼| 352. 내 상황 속에 내가 없다

환자가 내게 대충 이렇게 말한다. “형이 정신병이 있었고, 누나는 유명한 재즈 가수였고, 아버지는 내가 두 살 때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평생을 쇼핑몰에서 일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다가 마침내 나는 응수한다. “모든 집안 식구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하면서도 본인 자신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게 흥미롭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게 뭐가 잘못된 거냐고 거칠게 반응한다. 환자가 부모와 형제자매에 대한 원망심을 털어 놓고 싶어하는 마당에 내가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는 세션이면 세션마다 쉬임 없이 똑같은 카타르시스 시나리오에 매달리고 나 또한 끈임없이 똑같은 사연을 귀담아듣는다. 정신상담이 증오심의 배설에서 그치는 경우에 더 이상 아무런 진전이 없는 제자리 걸음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은 끔..

|컬럼| 350. 진짜가 될 때까지 속여라

직장 동료와 수다를 떨다가 ‘언행일치’를 어떻게 번역할지 몰라 말이 막혔다. 이중언어 사이를 왕래하다 보면 와이파이가 끊어지듯 영어의 흐름이 졸지에 끊어지고 한국말이 쓱 나타나면서 의식을 차단할 때가 종종 있다. 나중에야 마음에 좀 들까 말까 하는 번역이 떠올랐다. ‘Put your money where your mouth is’ – ‘자네는 행동을 말에 맞추어야 해’ -- 이때 ‘money’는 사람의 행동을 부추기는 동력이고 ‘mouth’는 물론 말(言)이다. ‘언행일치’에 해당하는 표현이 또 생각났다. ‘Practice what you preach’. – 직역으로, ‘네가 설교하는 걸 실천에 옮겨라’. 이 금언에는 우리가 남에게 설교하는 건 쉽지만 그걸 몸소 실천에 옮긴다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