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85

|컬럼| 234. 감나무 밑에 누워서

‘apple’은 17세기까지만 해도 딸기 종류를 제외한 모든 과일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스펠링이 좀 다르기는 했지만 고대영어로는 대추를 ‘손가락 사과 (finger-apple)’라 했고 바나나를 ‘낙원의 사과 (apple of paradise)’, 그리고 오이를 ‘땅 사과 (earth-apple)’라 일컬었다. 구약에 나오는 금단의 열매가 실제로 무슨 과일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일부 학자들은 포도, 무화과, 석류, 심지어 버섯이라 추측하지만 어원학적으로 ‘낙원의 사과’라 불렸던 바나나를 내세우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를 내가 정신과 의사답게 유추하면, 이브가 뱀의 유혹에 빠져 조심스레 바나나를 입으로 가져가는 장면이 다분히 외설스러운 연상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에 뿌리를 박은 기독교적 사고..

|컬럼| 367. 개

2020년은 7월 16일이 초복이란다. 중복이 7월 26일, 말복은 8월 15일, 광복절날이다. 엎드릴 복(伏)은 ‘사람 인’과 ‘개 견’의 합성어다. 항복, 굴복, 할 때 쓰는 복자. 명실공히 복날은 날씨가 너무 더워서 사람도 개도 다 엎어지는 날이라는 의미다. 1614년 광해군 시대에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이수광의 저서 지봉유설(芝峰流說)은 복날에 음기가 고개를 들어도 양기에 눌려서 엎드리게 된다고 가르친다. 1613년에 발간된 동의보감에 개고기는 양기가 충만하여 허약한 체질에 좋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의사가 시키는 대로 복날에 개를 먹는 우리들! 개는 말 대신 소리를 낸다. 컹컹 짖거나, 끙끙대거나, 으르렁거리면서 매우 본능적인 소리를 낸다. 한 사람이 하는 말이 무의미하고 역겨운 소리로만 느껴질 ..

|컬럼| 366. Amor Fati

한 지인에게서 짧은 사연의 이메일을 받았는데 마지막 문구가 “매일 좋은 일만 있으십시오”다. 이런 덕담은 듣기에 좀 그렇다. 사시사철 좋은 일만 일어나라는 덕담이 빈말처럼 들린다. 매일 아침 마스크를 쓰고 병원문을 들어서면 직원이 대뜸 이마에 레이저 체온기를 들이대는 2020년 6월과 결이 맞지 않는다. “What does not kill me makes me stronger,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명언이 떠오른다. 니체의 강인한 초인(超人) 철학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초인은 고난을 견디기보다 발벗고 나서서 사랑한다. 그는 신의 가호를 바라기보다 신의 죽음을 선언한다. 당신과 나에게 강한 동기의식과 패기를 부여한다. 그는 하릴없이 좋은 일만 호락호락 일어나기를 바라면..

|컬럼| 328. 수다 떨기의 원칙 몇 가지

병동 입원환자 중에 성미 고분고분한 젊은 놈이 하나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걸면 어김없이 랩(rap)으로 대답한다. 흑인 악센트가 팍팍 들어가는 리듬감으로 쌍소리가 곧잘 튀어나오는 그의 즉흥 랩은,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끊임없이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나는 그 분열증 환자의 순발력에 깊이 감탄하면서 흐치흐치, 치커붐! 하며 랩에 합세하여 변죽을 울리고 싶다. 야, 너 또 랩 하냐, 하면 피식 웃으면서 내게서 얼른 줄행랑을 치는 아주 이상한 놈이다. 할아버지 제삿날 우리 집에 들리던 먼 친척 ‘떠버리 아저씨’가 생각난다. 여자들은 생선전을 부치면서 수군수군 수다를 떨지만 떠버리 아저씨는 한잔 거나하게 드신 얼굴로 아무나 붙잡고 큰 소리로 쉬지 않고 혼자 떠드신다. 그의 대화법은 독백에 가깝다. 자신은 여..

|컬럼| 351. Fishwife 스토리

꿈의 해석에 대하여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꿈의 해석은 똥꿈이나 돼지꿈 따위가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는 세간의 해몽과 엄청나게 다르다. 꿈은 개인적인 사연을 품고 있으므로 집단의식에 입각한 공식대로 풀이한다면 죽도 밥도 안된다. 꿈은 꿈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사적인 스토리텔링이다. 정신분석은 스토리텔링이라는 생각을 나는 자주 하는 편이다. 꿈을 해석하는 사람 또한 스토리텔링에 몰두한다. 두 사람이 숙연한 표정으로 마주앉는다. 이들의 대화는 과학적인 정보를 교환하는 작업이 아니다. 서로의 안색을 살피며 스토리에 전념할 때 둘 사이에 힐링이 일어나는 신비한 절차가 이루어진다. 어린아이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어머니가 읽어주는 베드타임스토리는 또 어떤가. 늑대, 곰, 혹은 남매를 가마솥에 ..

|컬럼| 365. ADHD

내과의사와 환자 얘기를 하다가 “Psychiatrists are not real doctors! - 정신과의사들은 진짜 의사가 아니야!” 하며 농담 비슷한 말을 했다. 환자가 병동 직원을 심하게 때린 정황이다. 내과의사는 환자가 복용하는 약의 혈중농도가 정상에 속하지만 좀 낮은 편이라 복용량을 높이면 좋겠다 한다. 삐딱하기로 소문난 그 환자에 익숙하지 못한 새파란 신참내기 직원이 맞았다는 걸 몰라서 하는 말! 혈중농도가 미흡해서 사람을 치다니? 다른 정신과의사가 같은 환자를 놓고서, 그 놈은 ADHD 환자로 진단명을 때리고 거기에 맞는 약을 쓰는 게 어떠냐, 하며 대충대충 하라고 조언한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꾸준히 각광을 받고 있는 ADHD는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컬럼| 364. 인 마이 포켓

어릴 적에 가끔 듣던 엉터리 영어, 인 마이 포켓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길에 웬 푼돈이 떨어져 있길래 인 마이 포켓 했다고 좋아하던 동네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한 인터넷 콩글리시 사전은 이 표현을 ‘횡령하다, 착복하다’로 풀이한다. 푼돈이 아닌 엄청난 금액의 공금을 한 여자가 인 마이 포켓 했다는 의혹이 연일 신문에 실리는 2020년 5월 말경이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더니 자기 돈이 아닌 돈을 자기 주머니에 꾸역꾸역 넣다 보면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그 금액이 점점 커지는 이치에 실감이 간다. 주인 없는 물건이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공금을 고의적으로 축내는 짓을 시쳇말로 도둑질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위선을 싫어하는 당신은 횡령이나 착복 같은 어려운 한자어보다 도둑질이라는 알아듣기 쉬운 말이 더 ..

|컬럼| 363. 멋, 맛

옛날 서울 종로에 만나당이라는 빵집이 있었다. 팥앙금이 듬뿍 들어간 만나당의 찹쌀떡 맛이 마냥 그립다. 만나당은 맛이 좋다는 뜻의 ‘맛나다’ 외에도 ‘만나다’를 연상시킨다.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반갑게, 또는 조심스럽게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긴 세월이 지난 요즘 한국은 빵집보다 ‘맛집’ 소식이 대단하다. 만나당 말고도 ‘맛나당’이라는 음식점 이름이 눈에 띈다. 사람보다 음식이 우선이란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emotional eating, 정서적 섭식’ 증상이 발생하는 2020년 5월 중순이다. 불안과 공포를 정성껏 삭히는 우리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집에만 있으면서 삼시 세끼를 준비하는 알뜰살뜰한 여인들이 업로드한 음식 사진들을 본다. 좋은 조명과 두드러진 색채감으로..

|컬럼| 362. 소통, 쇼통, 또는 소똥

병동환자 로버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코로나 사태 때문에 우리 모두 스트레스가 심한 판국에 약을 안 먹겠다니? 아무래도 법정에 가서 판사가 내리는 결정을 따라야 되겠다.” 환자의 인권존중 때문에 강제 투약은 꼭 법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전에도 법원의 강제 치료 판정을 받은 적이 있는 그는 걸핏하면 자기가 젊었을 때 보디 빌딩을 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셔츠를 들어올려 거북이 배처럼 희미하게 금이 간 복근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린다 맥칼리스터(Linda McCallister)의 저서, “I wish I’d said that, 내가 그걸 말했었으면”(1992)에 나온 대화방식 여섯 가지를 여기에 이렇게 간추린다. ➀ 귀족형 – 직설적이고 솔직하다.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어린아이가 “임금님이..

|컬럼| 361. 말할 수 없는 스토리텔링

-- To live is to suffer. To survive is to find some meaning in the suffering. (Nietzsche) -- 삶은 시달림이다. 살아남는 다는 것은 그 시달림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다. (니체) 제임스가 죽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망원인이었다. 몸이 뚱뚱하고 지능이 남들보다 많이 낮은 반면에 성격이 참 원만했던 제임스가 엊그제 죽었다. 내가 묻는 말은 전혀 대답하지 않고 딴소리를 하는 버릇이 있었지만 아무 결론 없이 이야기를 마무리해도 늘 좋은 기분을 남겨주는 병동환자였다. 내과의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저도 제임스를 좋아했다고 말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한다. 나는 코로나 환자와 가족과 응급실 의사들의 미치광스러운 나날에 대하여 잠시 생각한다. 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