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이 끊어진 이탈리아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할 뿐, 배경음악이 없는 화면진행이 한동안 지속된다. 한 사람이 방에서 입을 꾹 다물고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이 이어진다. 2020년 3월 어느 주말,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대신 나는 티브이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전 세계에 창궐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독 이탈리아만을 집중적으로 강타하고 있다. 지구상 모든 국가중 이탈리아의 사망율이 최고치로 9.5 퍼센트.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들 열 명중 거의 한 명이 죽는다는 통계가 섬뜩한 현실로 우리를 엄습한다. 중국은 일찌감치 질병이 발생한 원조이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미국이 버럭버럭 소리치며 울부짖는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바이러스의 숙주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에 뵈지 않는 바이러스를 경계하고 회피하려는 마음에서 사람을 멀리하려고 애를 쓴다. 마트에서 한 사람이 다가오면 저 사람이 무증상 보균자라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을 슬쩍 감추면서 그의 안색을 살핀다.
‘Social Distancing’이라는 단어를 접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 한다. 사람이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최소 2미터 이상은 떨어져서 말도 크게 하고 싶지 않고 숨도 깊이 쉬고 싶지 않다.
‘social’은 14세기에 라틴어와 중세 불어에서 ‘동반자, 함께 어울리는 사람’을 일컬었는데 그 전신인 전인도 유럽어에서는 누구 뒤를 따른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나를 따르라’ 하면 겁에 질린 사람들이 묵묵히 그를 따르는 장면이다.
‘social’에는 엄밀히 말해서 서로가 대등한 동료의식이 아니라, 지도자와 추종자의 뉘앙스가 깃들여진 개념이었고 지금도 사회주의(socialism)이라는 정치용어에 그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어원학적 차원에서 사회주의는 강한 지도자와 고분고분한 추종자를 요구한다.
‘distance’는 원래 13세기에 고대 불어에서 ‘거역하다, 다투다’라는 반항심을 푹푹 풍기는 뜻이었다가 근 200년 후 14세기 말에 비로소 ‘거리’라는 현대적인 의미로 변했다.
‘social distancing’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매우 모순적인 말이다. 무슨 말이 이런가. 고분고분한 거역? 지도자, 보호자의 뒤를 싫어도 억지로 따르는 이율배반적인 군중의 정신상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교훈을 곰곰이 생각한다. 기원전 4세기 저서 ‘정치학’에서 그는 연이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거나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어서 사회에 참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짐승이거나 신이다.” (본인 譯)
나는 이 발언을 한 지도자로의 선언이라기보다 개개인으로는 아주 미약한 인류가 서로 힘을 합쳐서 험하고 힘든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어려움을 무마시켜 주는 그의 편안한 포용심으로 해석한다.
다닥다닥 늘어선 아파트 발코니에 악기를 들고 나와서 멀리서 서로를 바라보며 박자를 척척 맞추어 음악을 연주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왕성한 혈기가 화면을 덮는다. 그들은 연주가 끝난 후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크게 벌리고 마음껏 웃음을 터뜨린다.
지금은 비록 당신과 내가 물리적 거리감을 두고 있지만, 그래서 우리의 천성이 느끼는 소외감이 있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힘을 모아 공동의 적 코로나 바이러스를 훌륭히 물리칠 것이다. 연약한 동물적 감성을 달래면서 오랜 세월동안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온 인류의 따스한 지성으로 서로를 보듬어줄 것이다.
© 서 량 2020.03.22
--- 뉴욕 중앙일보 2020년 3월 25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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