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85

|컬럼| 313. 꿈에 대한 보충설명

당신이 내게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한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Interpretation of dreams, 1899년 출간)’이 가르쳐준 몇 가지 원칙을 추종하는 정신과의사로서 나는 좋은 음악에 심취하듯 당신 꿈의 내용에 몰입한다. 꿈의 내용에는 ‘드러난 내용(manifest content)’과 ‘감춰진 내용(latent content)’이 있다. ‘드러난 내용’은 거죽으로 나타나는 사실적 요소다. 당신은 꿈에 어느 버스 정거장 벤치에 홀로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한 모르는 남자가 우산을 들고 당신 쪽으로 걸어온다. 방금 열거한 사실적 진술이 드러난 내용의 좋은 본보기다. 드러난 내용은 수박 겉핥기 식의 내용이다. 당신의 행선지가 어디였는지, 그 정체불명의 우산 든 남자가 어떤..

|컬럼| 385. 봄

회의 시작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무료하게 앉아있던 직원이 올해는 3월 14일에 서머타임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시계 바늘을 앞으로 당기는지 뒤로 돌리는지 헷갈려, 하며 투덜댄다. 그거 ‘March forward, fall back, 3월은 앞으로, 가을은 뒤로’ 아니야? 하고 내가 말하자, ‘Spring forward, fall back, 봄은 앞으로, 가을은 뒤로!’ 하고 누가 잽싸게 교정해 준다. 3월에 시간을 바꾸자니까 그런 말이 튀어나왔나? 3월 대신에 행진(march)이라는 컨셉에 몰두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영어로 3월과 행진은 같은 단어다. 내가 그렇게 말한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근래에 입에 붙은 ‘move forward’라는 관용어가 나를 순간적으로 장악한 것이다. 회의 도중 토의가 ..

|컬럼| 262. 사랑과 공격

뉴욕 코넬 의과대학의 오토 컨버그(Otto Kernberg: 1928~) 밑에서 정신과 수련의 과정을 밟은 것은 내 직업 인생에 있어서 1970년대 중반에 터진 커다란 행운이었다. 현재 컨버그는 성격장애(Personality Disorder)의 진단과 치료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그는 우리 시대에 점차로 쇠잔하는 정신분석학에서 내가 존경하는 마지막 자이언트다. 체질적으로 언어에 지독한 관심을 품은 나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약이나 수술보다 말을 사용하는 기법에 심하게 심취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란 상대의 마음을 보듬어 파고드는 행위이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고도의 기술과 경험을 요구한다. 마음이 마음을 치료한다는..

|컬럼| 384. 비겁한 처방

입원환자 약의 복용량을 놓고 다른 정신과의사와 회의석상에서 토론이 벌어진다. 의사들의 처방습관에도 어쩔 수 없이 각자각자의 성격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토론이 논쟁으로 변한다. 약의 효능보다 부작용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변론이 나온다. 어차피 아무리 약을 써도 증상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 것이 ‘정신분열증’이니까 아예 미리부터 약의 부작용이나 방지하자는 속셈이 내보인다. 적극적으로 병의 증세를 호전시키는 약물투여는 관심 밖이다. 나는 2010년부터 한국에서 통용되는 ‘조현증’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못하다. 사람 뇌의 신경구조가 현악기가 아닌 이상 조현(調絃)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올들어 어느덧 46년째 정신과의사로 일하고 있지만 정신분열증이 뇌질환이라는 단정을 내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환자의 두뇌장애..

|컬럼| 383. 옷 벗는 사람들

코로나 백신으로 지구촌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2021년 2월에 한국 소식을 듣는다. 얼마 전 한 장관이 옷을 벗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 추운 겨울에 옷을 벗다니. 동상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옷을 벗는다는 말은 어떤 지위에서 물러난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옷만 벗는 것이 아니다. 안경도 벗고, 마스크도 벗고, 베일을 벗고, 누명을 벗고, 때를 벗는다. 벗는 양상도 헐벗다, 벌거벗다, 빨가벗다, 등등 그 뉘앙스가 다채롭다. 앞뒤 가리지 않고 함부로 날뛰는 사람을 일컫는 ‘천둥벌거숭이’도 재미있는 말이다. 우리는 참 벗기를 좋아한다는 논리의 비약이 가능하다. 왜 그럴까. 다혈질이라서? 병동환자가 이유 없이 옷을 벗고 알몸으로 복도를 서성거릴 때가 있다. 직원이 황급히 시트로 몸을 가려주면 순순히 자기 방에 가서..

|컬럼| 382. 알파 메일

눈 내리는 일요일 오후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원숭이에 대한 동영상을 보았다. 송곳니가 길게 뻗은 짧은 꼬리 원숭이(macaque monkey) 한 마리가 무리의 우두머리(the alpha)에게 왕위 찬탈을 위하여 사납게 덤벼든다. 무뢰한은 우두머리에게 패배하고 초라하게 추방당한다. ‘alpha monkey’는 수년간 관계를 다져온 충복들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공격력을 과시해준 덕분으로 싸움에서 이긴다. 원숭이도 원맥(猿脈)이 좋아야 왕권이 유지되는 법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당신과 나는 처음을 우선시하고 마지막을 피하려고 애쓴다. 그래서인지 ‘처음처럼’이라는 소주 이름이 꽤 호소력이 있다. ‘알파, alpha’는13세기에 히브리어..

|컬럼| 73.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우리 전래동화에서 사람과 호랑이가 대적하는 장면을 유심히 살펴 본 적이 있는가. '팥죽할머니'와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같은, 구질구질하면서도 정감이 듬뿍 가는 사연들을. 팥죽할머니는 닭이며 송아지를 잡아먹는 호랑이를 팥죽을 주겠다며 어느 날 저녁 집으로 초대한다. 할머니는 호랑이에게 불 꺼진 화로를 후후 불라 해서 눈에 재가 들어가게, 고춧가루를 탄 물로 눈을 씻게, 그리고 바늘을 촘촘히 박아 놓은 행주로 따가운 눈물을 닦게 한다. 호랑이는 마당으로 뛰어나가다 개똥에 미끄러지고, 멍석 도깨비에 둘둘 말리고, 지게 도깨비에 얹혀 운반되어 강물에 첨벙 던져진다. 당신은 또 떡바구니를 들고 산언덕을 넘을 때마다 번번히 호랑이를 만나는 떡할머니를 기억하는가. "할멈, 할멈.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

|컬럼| 381. 그레고리

로버트가 또 며칠 동안 약 먹기를 거부했다. 병동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눈치를 보였지만 다른 환자들이 쉴 새 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와 여유 있게 말할 짬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로버트가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약을 거절했다는 해석은 맞지 않는다. 나는 그의 마음 씀씀이를 좀 알고 있는 편이다. 전에도 바쁜 와중에 대화를 나누지 못한 상황이 몇 번 있었는데 약을 끊으려 하지는 않았다. 로버트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심리학자와 소셜워커를 포함한 직원들 앞에서 아침 회진 시간에 그(*)와 대화를 나눈다. -왜 약을 안 먹으려 하지? *나는 돈이 많이 있어요. -내가 묻는 말에 답을 피하는구나! *나는 보디 빌딩을 좋아합니다. -다시 대답해라. 왜 약을 안 먹지? 약을 안 먹으..

|컬럼| 311. 새로운 옛날

뉴스(news)는 새롭다(new)는 형용사에 다수를 지칭하는 알파벳 ‘s’가 붙어서 만들어진 명사로서 새로운 소식이라는 뜻이다. 철 지난 소식의 위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오래된 뉴스를 ‘old news’라 한다. 꽃피고 새우는 봄이 올라 치면 당신과 나는 추운 겨울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에서 기지개를 켜며 봄을 맞이하는 새로움에 몸을 떨지만 이 봄은 낡고 구태의연한 ‘old news’다. 새로운 봄은 옛날 봄의 따분한 반복일 뿐.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성향을 성격유형을 연구하는 정신과 일각에서는 ‘novelty seeking(새로움의 추구)’이라 부른다. ‘sensation(감각)’을 앞에 넣어 ‘Sensation/Novelty Seeking (감각/새로움의 추구)’이라며 약자로 ‘SNS’라 해서 ‘So..

|컬럼| 380. 언힌지드

러셀 크로가 주연한 2020년 영화 ‘Unhinged’가 한국에서 번역 없이 그냥 ‘언힌지드’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것을 알았다. 영한사전은 ‘경첩을 뗀, 불안정한, 혼란한’이라 풀이한다. ‘unhinged’는 슬랭으로 미쳤다는 뜻으로 매우 모욕적인 말이다. 경첩이 떨어져 나간 문을 상상해 보라. 제대로 닫히지 않아서 제 구실을 못하는 문의 황량함을 생각해 보라. 신호등 앞에서 꿈지럭대는 앞차에게 빵~ 하고 경적을 울린 여주인공이 심한 보복을 당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무서운 속도로 쫓아온 앞차 운전수 러셀 크로는 사과를 요구한다. 그녀는 차갑게 거절한다. 분노에 찬 그가 줄기차게 그녀의 가족과 연고자를 해코지하고 죽인다. ‘unhinged’를 ‘뚜껑이 열리다’, 또는 ‘꼭지가 돌다’라고 본 뜻에 가깝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