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서울 종로에 만나당이라는 빵집이 있었다. 팥앙금이 듬뿍 들어간 만나당의 찹쌀떡 맛이 마냥 그립다.
만나당은 맛이 좋다는 뜻의 ‘맛나다’ 외에도 ‘만나다’를 연상시킨다.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반갑게, 또는 조심스럽게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긴 세월이 지난 요즘 한국은 빵집보다 ‘맛집’ 소식이 대단하다. 만나당 말고도 ‘맛나당’이라는 음식점 이름이 눈에 띈다. 사람보다 음식이 우선이란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emotional eating, 정서적 섭식’ 증상이 발생하는 2020년 5월 중순이다. 불안과 공포를 정성껏 삭히는 우리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집에만 있으면서 삼시 세끼를 준비하는 알뜰살뜰한 여인들이 업로드한 음식 사진들을 본다. 좋은 조명과 두드러진 색채감으로 나를 현혹시키는 저 멋진 사진들!
맛과 멋은 말의 뿌리가 같다. 멋은 맛이 변한 말이다. 멋은 맛이라는 미각에서 시각 용어로 변하면서 나중에 추상적인 의미로 전환됐다. (조혁연, 2003)
우리의 숱한 감각과 감성은 서로의 영역과 경계를 손바닥을 뒤집듯이 넘나들고 침범하고 장악한다. 무엇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는 감성을 두고 눈에 ‘밟힌다’고 말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멀쩡했던 시각이 운동감각으로 송두리째 전환되는 순간이다.
‘맛깔스럽다’는 음식이 입에 당길만큼 맛이 있거나 무엇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당신은 전복죽이 맛깔스럽다는 말도 하지만 어느 수필가의 문체가 맛깔스럽다는 논평도 한다. 어떤 시가 감칠 맛이 난다고 말했을 때 한편의 시를 양념이라도 쳐서 먹는 장면을 누구도 연상하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기능은 손에 어떤 물체가 잡히면 응당 입에 넣으려는 생후 몇 개월의 간난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마음도 먹고, 욕도 먹고, 감동 먹고, 사기꾼들은 돈을 떼어먹고, 남을 등쳐먹고, 식인(食人) 근성이 있으면서 말투가 사나운 사내들은 여자를 먹는다는 비속어도 쓴다.
우리의 구강성(口腔性)은 이토록 세련미 있는 패션감각과 예술과 멋진 인간성을 추구하면서도 아주 일상적이고 조잡한 항목들을 두루두루 겸비하고 있는 것이다. 취미(趣味)와 기미(氣味) 같은 고도의 정신활동을 뜻하는 단어에도 ‘맛’ 미가 들어가는 것이 재미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재미’라는 일견 순수한 우리말이 자미(滋味, 자양분 있고 맛있음)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taste’라는 영어도 맛, 미각이라는 뜻 외에 기호, 취향, 경험, 풍미(風味)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He has a good taste’ 하면 그 사람의 취향은 품격이 있다는 뜻이고 ‘It left a bad taste in my mouth’ 하면 음식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경험의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는 뜻이다.
맛있다는 뜻으로 ‘palatable’이라는 좀 품격 있는 말이 있는데 어떤 일이나 사람의 언행이 입맛에 맞거나 마음에 든다는 뜻. 그 다양성과 강도가 우리들보다 많이 뒤떨어졌지만 서구인들도 이 정도의 구강성은 있는 모양이다.
홈 메이드 김밥이며 잡채 사진을 보면서 식욕이 솟는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리면 식욕이 없어진다는데 나는 건강한 것 같다며 자신을 안심시키는 동안, 옛날 서울 만나당 빵집 입구가 자꾸 눈에 밟힌다.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찾아낸 찹쌀떡이 컴퓨터 모니터에 뜬다.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더니. 그러나 그림의 떡은 어디까지나 그림의 떡인 것을 어찌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 서 량 2020.05.17
--- 뉴욕 중앙일보 2020년 5월 20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831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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