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76

|컬럼| 352. 내 상황 속에 내가 없다

환자가 내게 대충 이렇게 말한다. “형이 정신병이 있었고, 누나는 유명한 재즈 가수였고, 아버지는 내가 두 살 때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평생을 쇼핑몰에서 일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다가 마침내 나는 응수한다. “모든 집안 식구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하면서도 본인 자신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게 흥미롭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게 뭐가 잘못된 거냐고 거칠게 반응한다. 환자가 부모와 형제자매에 대한 원망심을 털어 놓고 싶어하는 마당에 내가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는 세션이면 세션마다 쉬임 없이 똑같은 카타르시스 시나리오에 매달리고 나 또한 끈임없이 똑같은 사연을 귀담아듣는다. 정신상담이 증오심의 배설에서 그치는 경우에 더 이상 아무런 진전이 없는 제자리 걸음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은 끔..

|컬럼| 350. 진짜가 될 때까지 속여라

직장 동료와 수다를 떨다가 ‘언행일치’를 어떻게 번역할지 몰라 말이 막혔다. 이중언어 사이를 왕래하다 보면 와이파이가 끊어지듯 영어의 흐름이 졸지에 끊어지고 한국말이 쓱 나타나면서 의식을 차단할 때가 종종 있다. 나중에야 마음에 좀 들까 말까 하는 번역이 떠올랐다. ‘Put your money where your mouth is’ – ‘자네는 행동을 말에 맞추어야 해’ -- 이때 ‘money’는 사람의 행동을 부추기는 동력이고 ‘mouth’는 물론 말(言)이다. ‘언행일치’에 해당하는 표현이 또 생각났다. ‘Practice what you preach’. – 직역으로, ‘네가 설교하는 걸 실천에 옮겨라’. 이 금언에는 우리가 남에게 설교하는 건 쉽지만 그걸 몸소 실천에 옮긴다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

|컬럼| 349. 똥 이야기

병동 입원환자 중에 젊었을 때 빌딩 옥상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져서 심한 두뇌손상을 받은 50대 중반 백인이 있다. 그는 나를 꼭 “닥터 오”라고 잘못 부른다. 내 이름을 아무리 바로잡아줘도 다시 그렇게 부른다. 모든 생명체에게 반복학습이 효과가 있다는 원칙을 굳게 신봉하는 나는 그를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김없이 나를 닥터 오라고 틀리게 호칭하는 그 놈이나 그걸 매번 지적하는 나나 서로 고집이 막상막하다. 따지고 보면 둘 다 똥고집이다. 고집(固執)은 사전에 ‘자기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버팀. 또는 그렇게 버티는 성미’라고 나와있다. 영어로는 ‘stubbornness’라 하는데 이 단어를 다시 영한사전에서 찾아보니까 똥고집, 외고집, 옹고집 등으로 나와있다. 그러니까 ‘막을 옹’자..

|컬럼| 342. 사랑을 할까, 생각을 할까

분노 조절을 남들처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라이언은 눈이 가을 하늘같이 짙푸른 30 중반의 백인 남자다. 민감한 발육 시기를 고아원에서 보낸 그는 걸핏하면 남과 싸우거나 말썽을 부리면서 오랜 세월을 정신병원에서 살아온 성격장애 환자다. 병동 직원들 거의 모두가 그를 싫어하는 눈치지만 나는 두뇌가 총명한 그를 좀 좋아하는 편이다. 세션이 끝나면 자꾸 “I love you, Doctor!” 하는 그에게 나는 으레 “Don’t love me. Think about what I said!” 한다. 그는 아직 왜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깊이 생각해 볼만큼 심리상담에 대한 관심이 없다. 라이언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 자랐다는 이유로 지금 부모 역할을 해주는 정신과의사에게서 긍정적인 관심을 받고 싶어서 안달..

|컬럼| 341. 내 그림자

그룹치료를 하던 중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가장 바람직한 대화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긍정적(positive)인 생각이 최고라고 누가 덧붙인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면 저절로 긍정적인 말이 오갈 게 아니냐고 한마디 보태니까 좌중이 숙연해진다. 이들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여건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알고 있을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사랑이 제일 으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positive’는 사전에 긍정적이라는 뜻이 첫 번째로 나오고 확실하거나 낙관적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모두 다 한자어다. 순수한 우리말에는 ‘positive’라는 개념이 없었던 걸까. 사실 ‘posi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