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85

|컬럼| 370. 빎

1980년대 말경 아메리카 온라인(AOL)에서 나는 인터넷 시(詩) 동호회의 열성 멤버였다. 켄터키 주 어느 멋진 여류시인과 문자를 주고받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남편이 방광암 진단을 받았는데 치유가 되도록 기도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다. 차마 무신론자라는 말을 못하고 그러마 했다. 나는 기도를 전혀 하지 않았고 몇 달 후 그녀 남편은 사망했고 그녀는 내게서 흐지부지 사라졌다. 수년 후 다시 인터넷에서 그녀와 마주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지만 대화가 전 같지 않았다. 그녀 남편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솔직히 나는 평생 기도를 해 본적이 없다. 가끔 남이 하는 기도에 실눈을 뜬 채 잠시 딴 생각을 하는 비기독교인이다. 정신과 월간지에 실린 “종교와 영성(靈性, sp..

|컬럼| 28. 악마와 호랑이

‘Speak of the devil and he is sure to come’이라는 영어속담이 있다. 이것을 ‘악마에 대하여 말하면 악마가 꼭 온다'는 식으로 직역한다면 당신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하는 순간 그 뜻이 귀에 금방 쏙 들어오지 않는가. 인간의 잠재의식에 깊이 박혀 있는 두려움의 대상이 동서양 간에 이렇게 좋은 대조를 이룬다. 옛날 양키들은 악마를 무서워했고 우리 선조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에서처럼 우리의 호랑이는 위기를 지칭한다. 반면에 ‘between the devil and the deep blue sea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서)’ 하면 진퇴유곡에 빠졌다는 뜻..

|컬럼| 369. 나는 없다

병동에서 ‘caretaker’와 ‘caregiver’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caretaker’는 빈집, 빌딩을 지키는 경비원이라는 말이면서 ‘간병인, 양육자, 보살펴 주는 사람’을 뜻하는 ‘caregiver’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take’와 ‘give’는 서로 반대말인데 어찌 의미가 같을 수 있냐고 간호사가 질문한다. 문제는 ‘care’라는 말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뜻을 품는다는 데 있다. ➀돌봄, 보살핌 ➁조심, 주의 ➂걱정, 염려 이토록 ‘care’에는 의료인이 환자를 치료하거나 간병인이 환자를 돌볼 때나 부모가 아이의 성장을 보살필 때 걱정을 해야 한다는 불안한 메시지가 숨어있다. 환자의 걱정을 빼앗아(take) 해소시키고 환자에게 보살핌을 주는(give) 것은 둘 다 같은 말이라고 간호..

|컬럼| 368. Medicine Man

피터가 말도 안되는 말을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다가 건강을 회복한 27살의 옆방 환자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후, 낮잠을 자고 있는 그를 자기가 목 졸라 죽였다고 간호사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물어본다. 그는 변호사 충고대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경찰이 언제 병동에 와서 저를 체포할 것이냐고 묻는다. 참, 너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감옥으로 후송 가겠다고 여러 번 말했지, 이 병동에 있기가 싫어서? 하며 나는 대꾸한다. 그는 나를 노려보기만 하고 대답이 없다. 환자가 ‘confabulation’을 했다는 보고서를 썼다. 단정적 진술이다. 이 말은 담소, 잡담, 수다를 좀 격식 있게 뜻하지만 정신의학에서는 작화(作話)라 지칭한다. 지을 作, 말씀..

|컬럼| 334. 화학반응 관계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마치도 화학반응 같아. 그들이 우리를 변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을 변하게 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달라진 상태에서 남들과 또 색다른 반응을 일으키는 거지. 그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Rust Creek’이라는 공포 영화에 나오는 말이다. 2019년 1월에 미국에서 개봉된 후 한국에도 ‘러스트크릭’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공포영화다. 러스트크릭은 산림이 우거진 켄터키 주 어느 음산한 작은 마을 이름. 위의 대사는 그곳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동네 불한당들에게 차를 뺏긴 뒤 사생결단으로 쫓겨 다니는 여자 주인공에게 숲속에서 혼자 사는 사내가 하는 말이다. 그는 양잿물과 성냥 따위를 섞어서 화학반응을 일으켜 가내공업으로 마약을 제조하는 아주 이상한 놈이..

|컬럼| 238. X 같거나 X만하거나

뉴욕 맨해튼 구치소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4년 전 그곳에 유치됐던 한 죄수가 당시 복용한 정신과 약 부작용으로 ‘지속발기증’을 일으켰다. 그런데 6일 동안 심한 음경의 통증을 진통제 타일레놀로만 치료한 결과로써 그는 성기능 불구자가 됐다는 사연이다. 성적인 흥분이나 자극 없이 네 시간 이상을 음경발기가 아프게 지속되면 일단 병원 응급실에 가서 외과적 치료를 받아야 한다. 치료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억울하게 음경을 절단 당한 그 죄수는 뉴욕 시를 고소해서 2015년 7월 6일, 75만불의 배상금을 받도록 판결을 받았다. 그는 데일리뉴스와의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한다. -- “If I had the choice between the reward and having my manhood res..

|컬럼| 234. 감나무 밑에 누워서

‘apple’은 17세기까지만 해도 딸기 종류를 제외한 모든 과일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스펠링이 좀 다르기는 했지만 고대영어로는 대추를 ‘손가락 사과 (finger-apple)’라 했고 바나나를 ‘낙원의 사과 (apple of paradise)’, 그리고 오이를 ‘땅 사과 (earth-apple)’라 일컬었다. 구약에 나오는 금단의 열매가 실제로 무슨 과일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일부 학자들은 포도, 무화과, 석류, 심지어 버섯이라 추측하지만 어원학적으로 ‘낙원의 사과’라 불렸던 바나나를 내세우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를 내가 정신과 의사답게 유추하면, 이브가 뱀의 유혹에 빠져 조심스레 바나나를 입으로 가져가는 장면이 다분히 외설스러운 연상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에 뿌리를 박은 기독교적 사고..

|컬럼| 367. 개

2020년은 7월 16일이 초복이란다. 중복이 7월 26일, 말복은 8월 15일, 광복절날이다. 엎드릴 복(伏)은 ‘사람 인’과 ‘개 견’의 합성어다. 항복, 굴복, 할 때 쓰는 복자. 명실공히 복날은 날씨가 너무 더워서 사람도 개도 다 엎어지는 날이라는 의미다. 1614년 광해군 시대에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이수광의 저서 지봉유설(芝峰流說)은 복날에 음기가 고개를 들어도 양기에 눌려서 엎드리게 된다고 가르친다. 1613년에 발간된 동의보감에 개고기는 양기가 충만하여 허약한 체질에 좋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의사가 시키는 대로 복날에 개를 먹는 우리들! 개는 말 대신 소리를 낸다. 컹컹 짖거나, 끙끙대거나, 으르렁거리면서 매우 본능적인 소리를 낸다. 한 사람이 하는 말이 무의미하고 역겨운 소리로만 느껴질 ..

|컬럼| 366. Amor Fati

한 지인에게서 짧은 사연의 이메일을 받았는데 마지막 문구가 “매일 좋은 일만 있으십시오”다. 이런 덕담은 듣기에 좀 그렇다. 사시사철 좋은 일만 일어나라는 덕담이 빈말처럼 들린다. 매일 아침 마스크를 쓰고 병원문을 들어서면 직원이 대뜸 이마에 레이저 체온기를 들이대는 2020년 6월과 결이 맞지 않는다. “What does not kill me makes me stronger,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명언이 떠오른다. 니체의 강인한 초인(超人) 철학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초인은 고난을 견디기보다 발벗고 나서서 사랑한다. 그는 신의 가호를 바라기보다 신의 죽음을 선언한다. 당신과 나에게 강한 동기의식과 패기를 부여한다. 그는 하릴없이 좋은 일만 호락호락 일어나기를 바라면..

|컬럼| 328. 수다 떨기의 원칙 몇 가지

병동 입원환자 중에 성미 고분고분한 젊은 놈이 하나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걸면 어김없이 랩(rap)으로 대답한다. 흑인 악센트가 팍팍 들어가는 리듬감으로 쌍소리가 곧잘 튀어나오는 그의 즉흥 랩은,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끊임없이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나는 그 분열증 환자의 순발력에 깊이 감탄하면서 흐치흐치, 치커붐! 하며 랩에 합세하여 변죽을 울리고 싶다. 야, 너 또 랩 하냐, 하면 피식 웃으면서 내게서 얼른 줄행랑을 치는 아주 이상한 놈이다. 할아버지 제삿날 우리 집에 들리던 먼 친척 ‘떠버리 아저씨’가 생각난다. 여자들은 생선전을 부치면서 수군수군 수다를 떨지만 떠버리 아저씨는 한잔 거나하게 드신 얼굴로 아무나 붙잡고 큰 소리로 쉬지 않고 혼자 떠드신다. 그의 대화법은 독백에 가깝다. 자신은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