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476

|컬럼| 337. 우리 나라 좋은 나라

친구와 이메일을 주고받던 중 “적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이 우연히 튀어나왔다.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싶어서 검색을 했더니 만화가 월트 켈리(Walt Kelly, 1913~1973)가 포고(Pogo)라는 만화 주인공의 입을 통해서 한 말이란다. 포고는 이렇게 말한다. -- “We have met the enemy and he is us.” (우리는 적을 만났는데 적은 우리다.) ‘enemy’의 말뿌리에는 9세기경 고대 불어로 적 말고도 ‘악마’라는 뜻이 있었고 라틴어로 ‘친구가 아닌 사람’, 즉 ‘낯선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13세기의 영어권에서는 이 단어는 비기독교인을 지칭했다. 14세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전쟁 상대의 적군(敵軍)이라는 무시무시한 의미가 생겨났다. 여자 이름 ‘Amy’에는 ‘ene..

|컬럼| 335. 스크린 메모리

우리는 지난 날을 얘기한다. 어릴 적 기억을 불현듯이 떠올리거나 아침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퇴근길 주차장에서 직장 동료와 말을 나누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시대사조와 사회풍조와 가정환경의 테두리 안에서 심리적으로 발육한다. 그렇게 지난 날을 벗어난 듯한 환자들이 내게 과거를 털어 놓는다. 그들의 현재가 과거에 받은 상처의 결과라는 생각의 덫에 걸려서 나는 한 사람의 유전적 요인보다 그가 겪은 인생경험에 더 큰 관심을 쏟는다. 프로이트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한다는 원칙을 정신분석의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현재의 원인이 과거에 있다는 이론에는 어딘지 아리송한 구석이 있다. 나는 현재가 과거의 금단 없는 연속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할 때가 많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우리 속담은 ..

|컬럼| 333. 왜 난동이 일어날까

내가 일하는 정신병원은 병원 전체가 폐쇄병동이다. 환자들이 다른 병원을 여러 군데 전전하다가 후송돼 오는 곳이기 때문에 증상이 호전되는 것이 어렵고 오래 걸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확성기를 통하여 ‘코드 그린’이 전 병원에 울려 퍼진다. 직원들이 비상사태가 터진 병동으로 뛰어간다. 한 환자가 난동을 피운 결과가 코드 그린의 원인이 된다. 그린, 초록은 성장의 상징이니까 환자들이 정신적 성장을 위하여 난동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나는 자주한다. 어릴 적 길거리에서 내 또래 코흘리개 어린애들이 치고 박는 싸움이 나면 동네 어른들이 “싸워야 키 큰다”며 소리치며 애들 몸싸움을 선동하던 기억이 난다. ‘agitation, 난동’에 대하여 환자들과 토론했다. 난동을 피우는 환자는 병동직원이나 다른 환자..

|컬럼| 332. 통찰력

‘insight’는 사전에 ‘통찰력’이라 나와있다. 지금껏 이 정신의학 용어를 ‘안식(眼識)’이라 우리말로 옮기면서 나는 미국에서 정신과의사로 일하고 있는 참이다. ‘insight’는 통찰력이라 하지 않고 ‘속 모습’, 혹은 유식한 한자로 ‘내부시력(內部視力)’이라 하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자기만의 속 세상이 있다. 수박 겉핥기 식의 껍데기보다 숨겨진 진실이 더 중요한 사람들에게 ‘insight‘를 ‘속 모습’이라 옮기면 훨씬 좋은 번역이 아닐까? ‘in(속)+sight(모습)=참 모습’이라는 등식이 너끈히 성립된다. ‘insight’에 대하여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치듯 환자들에게 대화식으로 강의를 했다. 인사이트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볼 줄 아는 능력이라고 내..

|컬럼| 330. 불

2019년 1월 찬 바람 몰아치는 어느 밤에 얼토당토않게 당신 집에 전기 누전 때문에 불이 나는 가상현실을 연출해 볼까 한다. 매연 때문에 갓 잠에서 깨어난 당신은 현관 문을 뛰쳐나와 떨리는 손가락으로 핸드폰에 911을 찍어 누른다. 이윽고 뉴욕 근교 소도시를 관할하는 소방차 여러 대가 경적 소리 요란하게 겨울 밤을 뚫고 들이닥친다. 불 소식을 들은 자식들과 친지들이 그런 일은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며 머뭇머뭇 말문을 터뜨린다. 보험회사와 수십 통의 전화통화가 이루어지고 현장에 출두한 회사 직원들과 눈살을 찌푸리며 대화를 주고받는 나날이 강물처럼 유유하게 흘러간다. 집을 다 때려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 한다고 한 전문가가 어두운 표정으로 선언한다. 그렇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화재다. 물과..

|컬럼| 329. 무서운 피터팬, 그 매정한

“한 아이를 제외하고 어린애들은 모두 자란다. 그들은 일찍이 자기네들이 자란다는 것을 알고 웬디도 그걸 알았다. 그녀는 두 살 때 어느 날 정원에서 꽃 한 송이를 꺾어 들고 엄마한테 뛰어간 적이 있다. 엄마는 가슴에 손을 얹고 '오, 네가 영원히 지금 같았으면!' 하며 소리쳤다. 이것이 모녀 사이에 꽃을 두고 생긴 일의 전부였지만 그때 웬디는 스스로 자라야 된다는 것을 깨달었다. 당신도 두 살이 넘으면 기어이 그걸 알게 된다. 두 살은 끝의 시작이다.” 피터팬의 첫 문단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번역해 보았다. 시(詩)와 이야기는 시작 부분에서 전체의 흐름과 윤곽을 암시한다.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아이로 알려진 피터팬은 절대로 성장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여러 번 밝힌다. 피터팬은 사실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