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나라 / 최양숙 황제의 나라 최양숙 인간의 몸으로 살 수 없는 이들이 영하의 세상에서 황제가 된다 들어갈 때는 날아들어갔지만 그들의 나라에서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날개 남극에 내리는 눈은 포근함을 유리병에 가둔 채 길들여지지 않는 바람을 바르고 얼음을 켜켜로 쌓아 산도 들도 백색으로 빚고 바다 같은 얼음..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1.16
가을이 내린다 / 최양숙 가을이 내린다 최양숙 투명한 햇살이 빚어냈던 눈부신 시절을 떨어뜨린다. 땅에서 끌어올렸던 달콤한 즙도 이제는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지난 밤 꿈꾸었던 내일도 떨어뜨린다 주인공인양 했던 꽃잎의 섬세한 색깔이 흙으로 돌아갈 때 모든 색을 비벼서 뒤집어 보리라 한번쯤은 초록을 벗어버리고 나..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0.27
허 수 아 비 / 송 진 허수아비 송 진 알곡이 잉태되어 자라는 동안 아무도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진흙 속에 묻힌 발이 시리고 저려도 알곡들이 제 모습대로 자리 잡고 여물기 시작할 때 그는 온 종일 날짐승들과 싸우느라 초주검 꼴이 되었다 뙤약볕에 삭고 비바람에 찢긴 남루를 걸친 채 풍성한 수확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0.20
도자기 / 조성자 도자기 조성자 적막을 탁탁 털어내다 중얼거림으로 꽉 차있는 빈 방 반닫이 위 불뚝한 배를 내밀고 있는 너와 마주친다 명장은 아니지만 흙을 다룰 줄 아는 이의 낙관을 받고 태어나 내 살림의 계보를 지켜가는 너에게 말을 건다 나는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0.06
오랜 친구 / 전애자 오랜 친구 전애자 올해도 가을이 찾아와 / 잘 있었냐고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떡인다. / 가을은 빙그레 웃는다. 그녀는 미국에서 알게된 유일한 오랜 친구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말 수도 많지 않고 귀품이 흘렀었다. 그런데 20년이란 세월이 그녀는 말이 많은 전형적인 아줌마로 변화시켰다. 나..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0.04
기묘한 구름 / 송 진 기묘한 구름 송 진 첼시 클린턴의 결혼식에 관한 입방아가 요란합니다. 오프라 윈프리를 위시한 하객명단에 초미의 관심이 쏠리고 그들이 거할 성채에 뭇 시선들이 매달려 안달들입니다 한 시인의 어깨가 해파리처럼 늘어져 있습니다 불경기의 한 속죄양이 되어 주거지마저 박탈당하고 이름 모를 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0.03
아침에 뜬 달 / 윤영지 아침에 뜬 달 윤영지 이른 아침 출근 길 갓 잠 깬 나무들 위, 연회청빛 하늘에 선명히 자리잡은 마알간 동그라미 아, 보름이 엊그제였지. 그래도 아침에 뜬 달치고는 너무 확실히 동그랗잖아 지난 숱한 날들도 구름 뒤에, 어둠 속에, 그리고 저 앞에 항상 있어왔건만 일 분 일 초에 쫓기는 닫힌 마음은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09.26
다시 이사콰천에서 / 송 진 다시 이사콰천(川)*에서 송 진 9월이 다 가기 전, 내려쳐질 망나니의 칼을 받는 자세로 이사콰천 다리 난간에 목을 느리고 아래에 흐르는 물 속을 헤집고 보면 흐르는 물살을 거스르며 여러 종대로 정렬된 검은 무덤들 나는 전생에 연어였을까? 어느새 슬그머니 그 사이에 파고들어 주위를 살핀다 이곳..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09.19
검색 / 최양숙 검색 최양숙 엔진을 달고 불어오는 바람이 회오리치는 문자의 파도를 실어온다 흑백의 해일은 방파제를 넘어오는데 이제 맨 앞에 나선 자는 흰 포말을 뿌리며 의기양양하다 그 뒤를 따르는 무리들도 끝없이 어깨를 들이미는데 온 몸으로 읽어내도 역부족이다 줄지은 목록이 숨가뻐서 시간의 수렁은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09.19
숨 죽인 갈망 / 윤영지 숨 죽인 갈망 윤영지 살아도 살아도 메워지지 않는 이 깊은 골은 흘러도 흘러도 채워지지 않는 이 타는 갈증은 그 옛날 울컥한 지각 변동, 쩍 벌어진 검은 틈새 저 ─ 밑바닥의 고립 미칠 것 같은 웅웅거림은 겹겹 지층을 할퀴고 더듬으며 찾는 수맥의 흔적, 온 몸으로 부대끼는 절절한 춤사위로 울부짖..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