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를 말리다 / 최양숙 장미를 말리다 최양숙 잎사귀를 떼어낸 장미는 매끈한 꽃대 위에 솟은 타오르는 횃불 거꾸로 매달면 뚝 떨어지는 검붉은 물방울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부터 떼어버렸던 찌를 줄 모르는 가시 백송이 장미를 거꾸로 매단다 풍성했던 당신을 그대로 갖고 싶어서 거꾸로 매단 장미는 더 이상 물을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2.21
겨울 달 / 임의숙 겨울 달 임의숙 거인인 당신은 달이였다 외눈박이 달이였다 동공속 분화구 진주알, 노란빛 모래알 같은 사람들 품어 눈자위 구름은 절망을 지웠다 희망을 썼다 깨져 나온 별똥별 부스러기 모아 노을의 계단으로 펼쳐진 선홍의 아픔들 새벽녘 비너스의 유리성으로 향하기도 했다 거인인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2.18
흔들의자 / 조성자 흔들의자 조성자 노년의 무릎 위에 소년이 앉아 파닥파닥 흔들리네 물살을 헤치듯 날렵하게 권태를 헤집고 나온 소년 한 겹 한 겹 저미며 제 생의 속살을 파고드네 돌아가는 길은 느리지만 생생하네 언젠가 본 듯한 풍경들 금방 알아보는 얼굴들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네 노을 빛으로 치솟던 욕망의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2.16
피노키오 / 임의숙 피노키오 임의숙 남자의 대패질이 멈추었다 털어내는 톱밥의 먼지들이 어스름 속으로 회전하자 도심지는 희뿌연 한 수증기를 쏘아 올린다 한 마리 거대한 고래 같았다 아니다 고래를 통째로 삼킨 도시였다 횃불을 밝혀든 간판들 사이사이 밀리고 밀리는 삶의 환부들, 비밀을 발설하지 않았어도 부서..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2.05
불안이란 허깨비가 / 윤영지 불안이란 허깨비가 윤영지 목 뒤에 찰싹 들러붙어 흡혈귀 이빨을 콱 들이박고 조여대고 있지. 으으윽 뻐근해, 이리저리 제껴보아도 박쥐 발톱으로 꽉 움켜잡고 놓지를 않는 거야, 허어- 이거 참… 진공청소기 호스로 빨아들이듯 두 눈알도 뻑뻑하니 뒤로 마구 잡아당겨지는거야 글쎄. 두근두근 심장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2.05
초록을 담는다 / 임의숙 초록을 담는다 임의숙 어스름이 없어도 차를 마시는 시간은 파자마를 입어 편안하다 흰 밧줄을 타고 티백(tea bag)은 빈 연못속 사각의 달로 내려 앉는다 햇살이 달군 뜨거운 주전자 구름의 얼굴과 바람의 높 낮이로 말려낸 기억은 방울방울 피어 오른다 찻잔의 수심처럼 손가락으로 짚어보면 닿는 손바..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2.02
길눈의 마음 / 전 애 자 길눈의 마음 전 애 자 나는 모릅니다. 눈이 오는 이유를 나는 모릅니다. 온 눈 위에 또 눈이 오는 이유를 나는 모릅니다. 온 눈 위에 온 눈 위에 또, 또 눈이 오는 이유를 다만 길눈이 되어 오자마자 차에 치어 다쳐 터지다가 천덕꾸러기로 살면서 결국 까맣게 타서 없어지는 길눈의 마음은 알 것 같습니..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2.01
다시 눈 내리고 / 황재광 다시 눈 내리고 황재광 눈이 내린다 지난번 내렸던 눈 더러워져 다시 하얗게 눈이 쌓인다 “사랑한다 그립다” 멀리서 공부하는 딸아이에게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 늘 블랙으로 마시던 커피에 갑자기 하얀 설탕 한 덩어리 넣고 싶어졌다 물론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눈이 연거퍼 내리는 데도 무슨 이유..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1.28
눈물의 시트론 / 조성자 눈물의 시트론* 조성자 빌딩 사이를 비집고 오느라 홀쭉해진 겨울 햇살은 수도자의 청빈 같다 골목을 휘젓고 다니던 폭주족 같은 바람도 그 앞에서는 순하게 눌러 앉는다 채촉하는 걸음들 사이 떨어져 있는 기억의 파생 더러는 줍고 더러는 흘리고 마는데 시간 저 너머가 뜨끈하게 옆구리 속으로 든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1.24
" 나, 여기 있어요! " / 전애자 “나, 여기 있어요!” 전 애 자 도둑눈이 와서 환한 아침에 카메라를 메고 거리로 나갔다. 몇날 며칠을 겨울신은 사람 사는 세상에 때론 함박눈으로 때론 싸라기눈으로 때론 진눈깨비로 온 눈 위에 덧칠을 했다. 겨울신의 작품 속에서 마술처럼 변하는 자기들의 모습에 자연물들은 버거워했으나 나는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