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새벽을 맞이한 늙은 소나무 / 윤영지 하얀 새벽을 맞이한 늙은 소나무 윤영지 한밤 중 내내 덮인 순백의 노송 잠시 내민 아침 햇살에 눈보라가 휘감겨 내린다 하얀 치장에 가리워진 지난 세월의 상채기 수액 잃은 세포들이 바스라져 날리운다 지난 폭설에 떨구어진 팔 하나 폭풍우에 떨구어진 다른 팔 하나 뚝 뚝 잘라주어도 아픈 내색 속..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1.13
낮게 흐르는 혈압 외 1편 / 한혜영 낮게 흐르는 혈압 외 1편 한혜영 아우의 혈압은 나지막하게 흐른다네 사뭇 점잖은 구름처럼 갠지스 강보다 낮고 겸손하게 흐른다네 어떤 생도 한 번의 뒤척임은 있다하던데, 낡은 혈관 속으로 생쥐 같은 분노라도 한 마리 투입시켜보라는 누나의 말에 아우는 팥죽처럼 어두운 얼굴을 천천히 흔들었네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1.07
봄은 아직 멀었는데 / 전애자 봄은 아직 멀었는데 전 애 자 오는 눈은 반갑고 쌓이는 눈은 반갑지 않은 장사꾼의 생각 오는 눈은 귀찮고 쌓이는 눈은 아름다운 사진 작가의 생각 오는 눈도 좋고 쌓이는 눈도 좋은 시인의 생각 잡다한 생각들 상관없이 봄비 같은 빗줄기가 눈을 치니 눈이 녹는다. 빈방 창에 기대서서 흰 더미들이 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1.04
소리의 의자 / 조성자 소리의 의자 조성자 음표는 소요하는 소리들을 붙들어 앉힌다 그 자리에 가만 앉아 있거라 다독인다 제 길을 자꾸 잃어버리는 음들을 도의 의자에 레의 의자에 미의 의자에 앉히고 숨돌려 돌아보면 하모니가 되어 소리의 산성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대의 자리가 갑갑한가? 인연의 사슬에 발목잡혔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2.31
도시 비둘기 / 최양숙 도시 비둘기 최양숙 인간의 죄를 40일간의 물로 심판 받을 때 노아의 방주에서 날려보냈던 비둘기는 올리브 잎사귀를 물어왔지 용서 받은 인간에게 생명의 소식을 물고 온 귀소본능의 비둘기 이제는 평화와 희망의 옷을 벗고 자생 능력만 남은 도시의 노숙자 그들의 방주를 찾지 못하고 거리에서 먹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2.18
불이 머물던 자리 / 조성자 불이 머물던 자리 조성자 거꾸로 매달려 제 속의 진액 다 말리우고야 시간을 정박시킨 장미꽃다발 몇 번의 계절을 돌고 돌고도 같은 자리이다 형체를 지키려고 죽을 줄도 모르는 저 막무가내 사랑의 뒤를 뒤적이는데 불덴 자리가 여적 붉다 한 때 불에 데이는 줄도 모르고 참 겁 없었으나 내가 당신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2.07
열망 / 송진 열망 송 진 저 나무, 푸르고 무성할 땐 여느 나무 중 하나로 눈길 끌지 못하더니 이제 철 지나 돌아가야 할 지점에서 망서리고 있네 남들은 마지막 길에서 곱게 단장한 모습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리는데 억센 잎들에 휘감겨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저 집착은 어느 날 강풍 불어와 그 몸 열어젖히니 덩그..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1.20
라운드 트립(Round Trip) / 황재광 라운드 트립(Round Trip) 황재광 이른 아침 동그란 계란 후라이를 먹고 둥근 오렌지 먹고 동그란 베이글 먹고 둥글게 고인 커피 마시고 둥근 빵모자 쓰고 둥근 지구 위를 걸어간다 둥글게 구르는 자동차 바퀴들 사람들은 건너편 동그라미 너머로 사라져가고 끝없는 계절이 펼쳐놓은 길을 따라가면 세상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1.20
십일월 / 조성자 십일월 조성자 전리품들을 지상의 배고픈 이들에게 다 내어주고 깊어간다 서슬 푸르던 눈매는 감나무 가지끝 까치밥에 걸려 붉어졌다 숱하게 날아드는 생의 파편들을 막아내던 심장도 누군가의 번제물로 불사를 준비를 한다 누구나 청춘에게 빚진 자들이다 그 눈가에 곧 서리 내리겠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1.19
소속감 / 윤영지 소속감 윤영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삼십 여 년 전 마루 바닥 낡은 교실 첫 윤리 시간, 비스듬히 먼지 어린 햇살 사이로 얽은 칠판에 쓰여진 말씀 칼칼하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호모 사피엔스’*도 언급하셨었지 가끔 혼자이면 그럴 듯 하지만 늘상 혼자이면 버티기 힘든, 군중을 떠난 휴식을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0.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