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시 / 임의숙 유월의 시 임의숙 새는 집을 다 지었습니다 바람의 붓 끝 한 자락 움켜지고 텅 빈 가지마다 초록을 털었습니다 나는 라빈*입니다 햇살이 닿는 노란 겉 가지에 아이의 울음을 걸어 놓고 그 울음이 다 마르기를 기다립니다 구름 들지 못하게 파초 잎을 드리워 풍경을 옮겼습니다 나의 미안함은 나뭇잎 그..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6.14
6월의 가로수 / 최양숙 가로수 최양숙 찬란한 햇살이 그리워 마음의 구름을 지우러 나가면 너는 온 몸을 활짝 열고 꽃가지로 엉킨 하늘을 쓸어 낸다 빗속에 줄선 너는 수많은 건반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빗방울 하나도 놓치지 않는 너 배반이 외로운 여행자를 위로하는 친구 바람 불어 홀로 서기 힘든 날 너는 바람을 불들..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6.03
메테오라 / 송 진 메테오라 송 진 죽어서 절경이 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잘못 찾아온 행성을 기어이 탈출하려는 듯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둥지를 틀고 하늘까지 닿을 사다리를 만들다가 너무나 간절한 마음으로 만들기만 하다가 마침내 풍화돼버려 수도원 창고 선반 위에 갇힌 유골들과 마주쳤습니다 보물창고인양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5.19
새 신발에게 / 임의숙 새 신발에게 임의숙 길은 신발의 거울이겠지요 어제 걷던 길을 오늘 또 들여다보는 그렇게 나이가 들겠지요 나란히 다정하다가도 말다툼한 부부처럼 등을 돌리기도 하고 남인양 모르는 척, 쓱 빗겨가는 얼굴들 누구라도 한 번쯤 허공에 대상 없는 발짓 해 봤을 것입니다 밑창에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5.19
노란 리본을 휘날리며 / 윤영지 노란 리본을 휘날리며 윤영지 아주 아주 오래 전에 남자의 갈빗뼈 하나를 빼어 여자를 만들었다지 그 여자의 심장 한 부분을 떼어 만들어낸 것이 자식 아닐까요 그 아이가 기쁨으로 설레일 때 어미의 심장은 벅차오르고 그 아이가 아픔으로 내려앉을 때 어미의 심장도 죄어들지요 다툼은 인간들의 자..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5.09
봄날 거리에 서서 / 최양숙 봄날 거리에 서서 최양숙 혜화동, 원남동 비원 앞을 거쳐 들어가는 재동 골목 40년 전 처음 만났던 그 거리에 서서 여학교 교복을 입는다 흰 카라를 빳빳이 세우고 베레모를 쓴다 옛 교정에 남은 것이라곤 천연기념물 8호 백송 한 그루 600년 수령을 지나는 동안 지났을 수많은 장면들 희끗한 수피 비늘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5.01
목련 / 임의숙 목련 임의숙 스텐레스의 장막을 세우듯이 은빛 허공에 구름의 리듬은 얼음 조각들로 떨어졌다 그가 여러 날 울고 간 자리, 흰 못이 박혔다 허공을 더듬어 굴곡을 조율하는 가지들 걸려드는 빛들의 화음은 한 그루 나무에 수십 개의 못으로 흐트러져 박힌다 어둠을 뚫고 새벽을 지나 햇살이 나오듯이 ..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4.26
노란 백조 / 임의숙 노란 백조 임의숙 고개 숙인 목덜미가 부드럽다 산 밑자락 먹구름이 앉았다간 물웅덩이, 거울을 들여다 본다 도심이라는 호수에서 여린 기린의 목을 가졌는지 몰라 상상이라는 아바타*를 타고 텃새들의 둥지가 고도로 날아 오른다 그 아래 첨단 레고블락들 인공정원의 숲 한 움큼씩 뜯어내는 월드 트..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4.21
산책 / 임의숙 산책 임의숙 이 곳은 지도에도 주소록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마을 쫑이나 메리 같은 애완견은 아니지만 나는 후더*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 영화관을 지나 다국적 음식점 식당을 지난다 세탁소에 들려 맡긴 옷들의 상태를 살펴보고 도서관을 지난다 온천 욕을 즐길 수 있는 폭포수 옆 기역자로 꺾어..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4.07
봄날의 PAUSE / 윤영지 봄날의 PAUSE 윤영지 보라빛 크로커스. 분홍 히아신스, 노란 수선화가 어느 날 아침 나지막이 들어선 봄을 일깨워주고 있는데 까칠한 몸 속의 체온은 아직도 밑을 맴돈다 꽃 단장한 어휘들이 낯설고 감칠 맛 나는 촉감이 무덤덤하다 신경 날줄이 곤두서 수심으로 얽혀들고 엉켜진 거미줄 한복판에 봄날.. 김정기의 글동네/시 2011.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