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130

지구의 물 / 김정기

지구의 물 김정기 당신의 하늘에 남보라에 잉크를 풀었다 허리춤이 살아나는 관능의 물이 호머*의 포도주가 되어 지중해를 채웠고 물가루가 당신의 멋에 분해되어 몸속으로 스며들 때 어려운 색깔이 숨죽이며 번져 당신은 한 방울 유쾌한 뉴욕의 물. 마음속에 숨어있던 파인 구멍을 가볍게 덮어주는 달빛 온기를 잃지 말라고, 물의 씨를 말리지 말라고, 옥구슬이 되어 분만 되는 물방울은 여자에 엮이어 땅으로, 흙으로 스며든다. 스며든다. *19세기 미국화가 © 김정기 2010.07.27

몸 안에 진주 / 김정기

몸 안에 진주 김정기 몸 안에서 뜨거운 진주 서 말쯤 쏟아내고 박물관 앞뜰에 혼자 앉아서 낯선 하늘을 본다. 그물망 친 손마디에 바람 가락지 끼고 끓어오르는 것들을 집는다. “나는 괜찮아!”라는 마지막 말을 이마에 새기고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새로운 새벽을 기다리며 쉬어 가려고 손을 편다 몸 안에 진주가 잉태되어 다시 서 말이 될 때 황홀한 분만을 기다리면서 끝없이 타 올라 당신의 손을 잡으러 가만 가만히 일어서리. © 김정기 2010.07.22

노란 나리꽃 / 김정기

노란 나리꽃 김정기 조간신문을 집으러 돌계단을 오른다. 칠월 아침 건너 집 현관 앞에 노란 나리꽃 무리져 피어 있다. 길고 긴 여름날 허리 잘라 숱 많은 숲 지나와서 엊저녁 읽은 책 한권 그 글자들과 섞여 노란 나리꽃이 비를 맞는다. 떨어진 꽃잎에 스며든 말소리 그 만남이 끈을 풀고 서로 이야기한다. 넘치는 기사를 훑어보고 허풍 떤 활자를 집어낸다. 나리꽃의 새 봉오리가 연노랑이었다가 떨어질 즈음엔 짙어지는 것이 이제야 내 눈에 선명히 띄는 오류들인가. 귀처럼 순해져야 하는 눈썰미인데. © 김정기 2010.07.18

은빛 꽃 / 김정기

은빛 꽃 김정기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고양이는 여름마다 색맹을 앓는다 화초밭의 색깔 모두 빨아 먹고 물기마저 흡수한 그의 눈은 은빛만 보인다 찬란한 세상을 흑백으로 뒤집어 꽃피고 지고 이파리들 새순도 적요함으로 다스려 밑그림만이 선명하다 여름은 온통 은빛 빗방울이 되어 가는 길을 묻고 있는데 몸의 주름살 펴서 찬물에 헹구는 색깔이 없는 황홀함이여 윗동네 클린턴이 사는 차파쿠와 집값 같이 계절은 정확한 현찰이다 가늘고 굵은 선이다 가끔 우리 집을 기웃거리는 고양이의 눈에 보이는 빗방울은 은빛 꽃이다 © 김정기 2010.07.05

화성의 물 / 김정기

화성의 물 김정기 화성에도 물이 있대요. 숨은 사랑의 열기가 식지 않은 따뜻한 물이 하늘에 떠다닌대요. 나그네의 발자국에도 물이 고여 어둠속으로 스며들고 목마르면 손톱으로 샘을 파서 한 웅 큼 마시면 된대요. 파문이 일지 않는 강물은 밋밋해서 얼음판 같고 위로만 솟아오르는 분수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대요. 물이 있는 곳은 언제나 어둠뿐이라 색깔은 분별할 수 없대나 봐요. 눅눅한 시간 웃자란 바람이 온몸을 휘감아도 오래된 사람의 눈빛과 만날 수 있다면 어떻게 되었던 이렇게 불투명한 물속에서나마 소소한 대화의 끈과 가까워질 수 있다면 제비들이 떼 지어 남극으로 갈 때 묻어서 가다가 화성으로 가겠어요. 화성에 물을 마시면 잃었던 시간이 되돌아온대요. 안과 의사가 말했어요. 하루에 두 번씩 화성의 물을 떠다 눈..

홍보석 / 김정기

홍보석 김정기 새어 들어온 햇살에 몸을 덥히며 알속에서 알을 낳아 깨뜨리면서 갇혀 있습니다 반짝이지 않으면서 찬란한 울림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등불이 되는 적막이 찬란합니다 이 공간에서 빚는 시간의 축제에 당신의 늪 속에 솟는 물로 비로소 목욕을 시작하면 늘어진 세포도 다시 줄을 당 깁니다 목에 걸린 가시도 삭아 내리게 하는 순연한 몸부림이 향내로 출렁입니다 그대의 숨소리가 있는 가는 8월이 견딜 수 없는 정현종의 시처럼 황금 물고기의 비밀을 알려 줍니다 여름 갈피에 빛나는 햇볕입니다 홍보석의 황홀한 경험입니다 © 김정기 2010.06.19

유월 꽃 / 김정기

유월 꽃 김정기 이해의 반이 지나간다고 꽃들은 아우성을 치는데 남의 연수 같이 낯선 오뉴월 볕 시간을 가로질러 온 울타리에 흰 꽃나무 눈송이 같은 꽃을 이고 소나기라도 지나는 날이면 나보다 먼저 몸 져 눕는 다 유월의 일기장 모서리가 흰 꽃잎에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칠월도 팔월도 있고 담에 기댄 장미도 울음 반 웃음 반 오후의 바람이 햇살 한 입 베어 물고 달리는데 어쩌란 말인가 또 다시 유월에 피는 꽃들마저 지고 있다니 다시 떠나간다니 이해도 조금씩 삭아가고 있다니 © 김정기 2010.06.18

숨은 새 / 김정기

숨은 새 김정기 창공이 무섭다. 썩은 어둠을 두르고 작아지는 날개를 움직인다. 발톱에 찍히는 바람의 무늬 오그라들어 점 하나로 남는 공간. 숨어서 껴안는 작은 그림자들이 빛나고 우리가 함께 버렸던 하늘이 흙이 되었던 비밀을 일러주는 색깔들. 뒤꼍에서 들리는 노래 소리에 다시 자라는 날개가 꿈틀거린다. 달빛의 힘줄을 딛고서. © 김정기 2010.06.08

그해, 서울의 봄 / 김정기

그해, 서울의 봄 김정기 오월이 지나간다. 잔인한 달이었던가. 그해 서울의 봄은 모든 결박을 풀었건만 유리창이 깨졌다 철통 같은 중앙정보부 유리벽 핏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부서졌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며 빛나던 총구에 녹이 슬어있다. 그 어깨에 별이 떨어졌다 그래도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 명령의 쇳소리는 이제 다시 우는 새가 되었다. 플러싱 어느 모퉁이에서 우리는 모여서 쓸쓸히 촛불을 밝히고 다시 우는 새가 되었다. 이번 오월에도. © 김정기 2022.05.27

해녀 / 김정기

해녀 김정기 해녀는 찬바다를 헤엄치면서 악기를 만든다. 전복을 캐고 물미역을 뜯으며 첼로를 켠다 첼로 소리는 해상으로 올라오면 곡소리가 되고 깊은 바다 밑에서는 가곡이 된다 삭아빠지고 짓무른 육신은 조금씩 떨어져나가고 고무 옷에 지느러미는 햇볕을 받아도 번쩍이지 않고 어둡다. 해녀가 만든 악기에서는 ‘별이 빛나는 밤’이 흘러나올 때 평생 키워오던 돌고래에 먹힐 위험으로 물을 차며 도망친다. 이 엄청난 바닷물이 모두 해녀가 쏟은 눈물이라는 것을 돌고래가 알기까지는 해녀가 바다 속에 갈아앉고 봄이 떠날 무렵이었다. © 김정기 2022.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