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130

두번 째 가을 / 김정기

두번 째 가을 김정기 손바닥 실금에서 피가 흘러요 그 줄기가 가을꽃으로 피어 따뜻하게 집안을 덮어도 안개가 안개를 몰아내는 길 돌아가는 길은 멀고 아득해요 죽지 않는 나무들이 몰려와 둑을 막아도 가을은 벌써 봇물로 쏟아져 들어와서 무릎 위를 차오르고 있어요. 두 손에 받든 하루의 무게를 공손하게 맑고 아름다웠던 당신에게 드려요. 손바닥 굵은 금에서 강이 흘러요 이 강은 소리 없는 곳으로 흘러가 가을 억새밭에 당도한대요. 천만가지 빛깔이 어우러진 보기만 하여도 기절할 것 같은 이 가을날이 이제 조금, 아주 조금 눈에 보여요. © 김정기 2010.11.02

고추냉이 / 김정기

고추냉이 김정기 아궁이 불을 끄고 들길로 나섰다 민들레는 피가 굳어 거친 숨을 내쉬고 강아지풀도 바람에 시달려 소리지른다 한풀 꺾인 가을 풀 섶에서 보랏빛 꽃 한 송이 엷어가는 햇살에 몸 적신다 매운 맛을 키우려 숨어있는 고추냉이 속으로 숨을 고르며 독을 키운다. 감추어둔 말을 쏟으며 날파리가 기어간다 기다리는 것도 지친 발걸음에 부서지는 가을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당신은 어디에도 없구나 버려진 풀끼리 쓰다듬는 틈새에 보이는 것이 있다 빛 알갱이들이 무리 지어 태어나는 고추냉이 속살. 다시 불을 지피고 매운 맛에 떤다. © 김정기 2010.10.28

모래장미 / 김정기

모래 장미 김정기 골수에 단맛 다 빨리고 가슴에 꽂은 장미 사람들은 절하고 울음 울고 떠나지만 시선이 꽂히면 와르르 무너지는 꽃. 비단 자켓에 달았던 코사지 향기마저 갖추었네. 바위 결에 돋아난 그림 한 장 어두움은 언제나 당신 안에 스며들어 분명히 꽃이었던 자리에 피어나는 허공 물결을 잡으러 떠내려 왔던 개울가 자갈에서 꽃이 보이는 날 모래 장미를 달고 외출하면서 조금씩 더 수줍어하리 수집음이 슬픔이라 한들 당신이 나를 용서 할 수 있겠나 어머니 적삼에 달았던 꽃도 이제 보니 한 웅큼의 흰 모래였네 매운 무를 씹어 삼킬 때마다 꽃을 달아 주시던 모래 손. © 김정기 2010.10.12

가을도시 / 김정기

가을도시 김정기 새는 몸을 허물어 도시를 덮었다. 열린 창문마다 햇살을 불러들이고 물기 가시는 가로수엔 준비된 적요가 홀가분하다 그의 벤치에는 새들 앉았다가 날아간다. 유엔 빌딩 옆 이끼 낀 돌담에 담쟁이 넝쿨 까칠해진 살결에 박혀 조그맣게 흔들리는 손가락들. 음악을 하려다 시를 쓴 사람의 집 전화통속에 들리는 불자동차 소리 5th 애비뉴 성당에 파이프 올간과 자지러지는 풍금소리에 뮤지엄마다 반 고흐와 샤갈의 노랑과 남빛의 휘장을 조용조용히 열고 몰래 치룬 장례에 숨어서 우는 달빛 하나의 외로움으로 떠나고 있다. © 김정기 2010.09.24

조국 / 김정기

조국 김정기 한글로 조국이라고 쓰면 잉크자국이 종이위에 번져 나간다. 입속으로 조국을 발음하면 목구멍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3사단 연병장에 날리던 태극기 파크 애비뉴 56가에서 만날 때 마다 가슴이 뛴다. 논두렁에 풋콩이 여물고 달뜨는 저녁이면 냇가에서 버들피리 소리 조국의 숨소리로 들린다. 핏줄은 속일 수 없다고 거리에서 만나는 동포들 걸음걸이만 보아도 낯 익어 눈이 부시다. 강원도 한탄강 강물에 비추인 조국이여 그 맑음이여 영원한 그리움이여. 당신이 나를 버려도 나는 祖國을 버리지 못한다. © 김정기 2010.09.13

이끼 낀 돌 / 김정기

이끼 낀 돌 김정기 속 깊이 자라고 있는 멍 자국을 만져가며 푸른 것은 푸른 것끼리 덧나서 이끼 입고 있는 돌은 외로움을 만들어 피라미들이 떼 지어 와도 요동치 않는 어금니 앙다물고 두 주먹 움켜쥐었구나.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굴러야 빛난다고. 여름 저녁 빛이 창으로 쳐들어올 때 아직도 홍조 띄우며 황홀해 하고 평생 한 가지만 붙잡고 웅크리고 앉아 반짝이지 못 하였다네. 온몸에 푸른 멍들고도 울지 못 하였다네. © 김정기 2010.09.06

서해 바다소금 / 김정기

서해 바다소금 김정기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결, 출렁이던 바다물결 오늘 시장에서 사온 소금봉지에 쓰여 진 인천항에서 당신을 보낼 때 깃발로 날리던 남빛 글씨 서해 바다소금 달빛도 주저앉은 바닷가 염전에서 몸을 굳히던 짠맛 여기까지 찾아와 펄펄 살아나던 나의 지난날을 저려주는구나 세상 어디에 가도 살아 남기만 하면 되는데 켜켜로 소금치고 내쳐버려도 썩지 않는 추억 긴 이야기도 녹일 수 없는 사랑이 자라고 있지 않는가. 아직도 당신은 만질 수 없는 곳에 머물러 내 나라 서해 바다소금으로 기별을 주어 뉴욕의 풀들을 남김없이 저려주는구나 찬찬이 물에 녹여 그리운 해변에 바다 냄새를 만들어도 아직도 이 거리를 드나드는 햇살은 새롭게 낯설어 서해 바다로 다시 방향을 잡아야 하는 늦더위. © 김정기 2010.08.30

물의 고요 / 김정기

물의 고요 김정기 소용돌이 물살 나뭇잎을 탄다. 북녘 어디에선가 떠돌이로 왔다는 그는 돌고 도는 세상이 어지러워서 반대로 반 바퀴 돌아 땅을 잃었다 땅의 물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둥근 원을 그으며 말없는 걸어 내려오고 밤잠은 어디서 자는지 누구는 짚북데기 속에서 떡갈나무 밑에서 보았다고 했다 호숫가에 갈대들이 찬바람에 흩날리던 날 그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더란다. 한 다발 꽃을 피워내려고 검은 두루마기 껍질을 연못가에 벗어 놓고. © 김정기 2010.08.25

남은 여름 / 김정기

남은 여름 김정기 여름 강에 물고기들은 내 편이다 세상의 물고기들은 모조리 내편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그가 토하는 물의 숨소리를 그 빛깔을 지상이 아닌 것 같은 아름다움을. 자작나무 숲도 내 편이었다 내가 속이 비어가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순하디 순하여 속이 빈 나무들은 모두 내 편을 들어 주었다 천군만마를 얻어 겁날 것 없는 올해 나는 붉은 피가 되어 물고기의 맥을 점령하고 나무 가지 하나로 지휘하니 싸워서 이겨 내 품에 돌아온 평화의 얼굴을 만진다. 그리고 그대들은 말이 없다 내 안에 쌓인 시간에 불을 질러 가을을 맞을까보다 남은 여름을 부술까보다. © 김정기 2010.08.13

숲 / 김정기

숲 김정기 숲은 새벽의 기미로 달콤하다 술렁이며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어울려 여름을 만든다. 쓰르라미가 자지러지는 청춘의 손짓을 그때 그 순간을 잡지 못한 숲은 기우뚱거린다. 감춘 것 없이 다 들어낸 알몸으로 땡볕에 땀 흘리며 서있는 나무들에게서 만져지는 슬픔 절단해버린 발자국을 수 없이 되살리며 그들의 반짝임에 덩달아 뜨거움을 비벼 넣는다. 올해 팔월도 속절없이 심한 추위를 타는데 매일 시간은 새것 아닌가. 내 안에 충동은 오늘도 못 가본 곳을 살피지 않는가. 뒤 돌아보며 챙기지 못한 것 숨결 안에 가두고 오랜 비바람에 시달린 나무들의 얼굴은 상쾌하고 환하다 그들의 표정은 언제 보아도 편하다 더구나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웨스트체스터*의 여름 숲은. *뉴욕 북부 © 김정기 2010.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