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130

뉴욕의 물 / 김정기

뉴욕의 물 김정기 당신의 하늘에 남보라 잉크를 풀었다 허리춤이 살아나는 관능의 물이 호머*의 포도주가 되어 지중해를 채웠고 물가루가 그 멋에 분해되어 몸속으로 스며들 때 어려운 색깔이 숨죽이며 번져 당신은 한 방울, 유쾌한 뉴욕의 물. 몸속에 숨어있던 파인 구멍을 가볍게 덮어주는 달빛 온기를 잃지 말라고, 물의 씨를 말리지 말라고, 옥구슬이 되어 분만 되는 물방울은 여자에 엮이어 땅으로, 흙으로 스며든다. 스며든다. *19세기 미국화가 © 김정기 2011.04.17

지금 / 김정기

지금 김정기 의사는 고민하지 않고 쓴 단어로 사람을 살리고 시인은 며칠 밤을 지새고 찾은 말로 한 시대를 데운다. 지금도 몬탁* 바다를 생각하면 세상을 놓고 싶다 온 몸에 불을 붙이고 때가 벗겨지는 검은 파도 어느 악연인들 무엇이 대수랴. 그 바다 앞에서 의사의 글씨를 기형도** 시를 읽은 밤의 화약 냄새를 그 지독한 길의 끝자락을 놓아버린다. 어둠의 근육이 태양의 눈을 가릴 때 그가 떠난 길이 아득하지만 바다 앞에 서면 지척인 듯한 지금 이 주소가 어디쯤인지. *Montauk: 뉴욕주 Long Island 동쪽 끝 곶 **시인이름 © 김정기 2011.03.16

익명의 마을 / 김정기

익명의 마을 김정기 오늘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나서 태양을 처음 보았네 갓난아이의 눈에 비추인 빛이 되어 눈을 뜰 수 없도록 눈부셨네 외로운 지구의 흙 계단이 혼자 쏟아내는 햇살 곁에서 서있네 사람들의 마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비집고 흠집으로 살아나 칭얼대고 삼십 년 동안 허공에서 소용돌이 쳐 다른 땅 다른 하늘에 서 있다네. 한 번도 태양을 못 본 마을사람들은 몰려와 태양에 대하여 묻고 있네 아직 태양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모른다고 더구나 죽음에 대해서는 더욱 모른다고 딱 잡아 대답 했네 돌아누우면 남이 되는 사람들은 세상의 시간을 계수하며 숨긴 이름을 찾으려 아직 머물고 있는 다른 가을을 기다리네. © 김정기 2011.02.09

겨울나기 / 김정기

겨울나기 김정기 바람 소리 몸속으로 스며들어 찬물에 손을 씻고 밀봉된 연서를 뜯어보는 영하의 밤 우리는 흘러간 것들 때문에 밀려오는 것을 밀어 내며 불을 지핀다 얼지 않은 바다를 건너 참나무 장작 불꽃이 되어 타 오르는 그는 시인은 영웅을 닮아 운명과 대결하며 끝없이 싸우다가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고 그럴 때 빛나고 아름답다고 이처럼 매혹적이고 장엄한 것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며 朔風도 영어로 불어오는 땅 아!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내가 사는 웨스트체스터를 달구고 있다 덩달아 나도 뜨거워져서 껴입은 옷을 벗어 휘영청 떠 있는 달 위에 걸며 겨울을 난다. © 김정기 2011.01.18

벽돌 깨기 / 김정기

벽돌 깨기 김정기 벽돌에서 풋사과 냄새가 난다 컴퓨터 안에 열리는 벽돌은 못 말리는 식욕이다 창을 때리는 새벽 빗소리다 숨겨놓은 사랑이다 은빛 포장지다 눈 내리는 고향마을이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떨리는 詩다 사람보다는 나무가 꿰지 않은 구슬더미가 시인보다는 시가 좋아지는 겨울에 벽돌은 공을 맞고도 부서지지 않는다 안으로 안으로는 조여 안아 금강석이 된다 사각형 가슴에 묻어 놓은 벽돌에 빨려 들어간다 남은 시간이 아깝지 않다 © 김정기 2011.01.08

겨울 포도 / 김정기

겨울 포도 김정기 몸을 핥는 땅은 섬뜩한 칼날이다 맨살 위에 새겨진 황토 흙의 흠집이다 허물 벗는 세포들의 몸부림에 흰빛 하늘이 내려와 어깨를 덮는다 돌아서는 지구의 혓바늘에 소금을 뿌리며 굳은 것은 이렇듯 쓰라린 것이다 아리고 뜨거운 것이다 살갗으로 데운 시간이 질척인다 침묵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떠나는 그대의 언 옷을 부여잡고 산 위에 떠 있는 노을을 적신다 낮아지고 낮아지는 겨울을 말린다 © 김정기 2010.12.22

겨울 소나타 / 김정기

겨울 소나타 김정기 이름 모르는 나무들이 다리를 절며 도시에 모여 든다 어둠은 때때로 살을 저미고 홀로 부르는 노래되어 처음 보는 겨울 숲을 건넌다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파두(fado)*를 들으며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닦던 당신 식탁에 물이 끓는다 모두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일 때 그래도 당신은 나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섬광 같은 일별(一瞥)이지만 갑자기 겨울은 환해졌다 겨울 나그네는 모닥불을 지피고 빛나는 것 들이 몰려오기 시작하고 감당할 수 없는 계절이 노래가 된다 고요하게 덮이는 겨울 소나타에 목을 추기며 겨울을 맞는다. *폴투갈의 전통 유행가 © 김정기 2011.01.11

꽃과 인터뷰 / 김정기

꽃과 인터뷰 김정기 내 몸에 꽃이 피다니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구나 시간에 앉은 흠집이 언제부터 싹터서 꽃이 되었고 소리칠 때마다 자라고 있었구나. 꽃잎, 한 겹씩 벗겨내서 말 걸어보자 이제 보니 너는 꽃이 아니었구나. 타관의 골목길을 돌고 돌아 나에게 안겨와 언제나 비로 다가와 눈물이 되었지 반짝이는 것들을 향해 들어설 때 새벽잠 깨어 뒤척일 때 찔러대던 가시가 꽃이 되다니 시만이 살길이라고 달려온 길 모퉁이에서 세상과 잡은 손을 놓고 말았지. 언제나 불씨를 갖은 꽃은 떠나가는 계절은 떠나 보내며 그래도 너는 모두 거두어들인 들판에 말없이 나에게 와서 어깨를 기대는구나. 꽃의 입김이 따스한 것도 이제 알겠구나. © 김정기 2010.12.06

바람모자 / 김정기

바람모자 김정기 남빛 바람모자 쓰면 겨울하늘을 나를 수 있네 잔가지 쳐버린 우리 집 나무들 틈을 비집고 탱탱하게 부은 구름 떼 속으로 솟아올라서 끝내 사라질 것들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바람의 손을 잡겠네 만질 수 없는 모자챙에 꽃을 달고 비도 눈보라도 뙤약볕도 막아버리고 세상에서 도달하지 못한 나라에서 곤히 잠이 들겠네 바람에 몸을 매달고 먼 곳으로 떠나서 그 빛나는 우주의 맨살을 만나 얽히고 설킨 이야기 풀겠네. © 김정기 2010.11.30

지리산 풀꽃 차 / 김정기

지리산 풀꽃 차 김정기 친구는 지리산에서 구했노라고 유리 항아리에 든 풀꽃 차를 나무탁자위에 놓고 갔다 빨치산이 살던 山麓에서 산과 싸우고 땡볕과 싸우고 싸우는 여전사의 이야기도 놓고 갔다 지금 그에게 말을 걸면 산꽃들이 살아날까봐 참고 있다 나를 데리고 지리산 기슭으로 가는 풀꽃 차 한 잔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산의 향기가 온몸으로 배어나 처참한 목덜미 살 한 치라도 당길 수 있으랴 밤이면 달빛 스며든 대궁에 소리꾼의 판소리 한 가닥 새어나오고 어두움에 지쳐 번개 치는 날이면 그 계곡의 물소리, 우려낸 찻물에서 들려온다. 친구가 다녀 간 달포까지 집안에 지리산을 들여놓고 진작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는 지리산 풀꽃 차 그 산 냄새. © 김정기 2010.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