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130

먼지 알러지 / 김정기

먼지 알레르기 김정기 공중에 먼지까지도 마셔버려 속에 꿈틀대는 것이 있다 먼지 알레르기라고 처방 받으니 이제 가장 작은 것만 보인다. 작고 단단해서 더 이상 부서질 수 없어 그가 정처 없이 떠날 때 나는 한 알의 먼지로 남아 아무데나 붙어서 함께 가는 길. 아무리 좁아도, 깜깜하고, 막막해도 내 안에 등불 켜져서 앞길을 밝히고 모두 놓아버린 낱말들을 삼켜 말들이 배를 채워 먼지가 되어, 그렇게 둔갑해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토해내는 초롱초롱한 반짝임. © 김정기 2009.11.29

보이지 않는 꽃 / 김정기

보이지 않는 꽃 김정기 돌아서면 보였네. 다가서면 져버리고 세상 넘어 외진 땅에 숨어서 피어 나에게만 보였네. 따스하게 꽃술에 볕이 들어 꽃잎에서 우러나오는 빛깔은 눈물 먹은 산색 같아 어둠에서라도 설레기만 하였네. 보이지 않아 여리게 더욱 어질게 고여 오는 봉오리 열리는 냄새 사방에 묻어나고 언제나 내 뒤에서 피고 지는 꽃 피는 얼굴과 지는 표정을 금방 알아차리는 나만 볼 수 있는 꽃 그대에게 보여주려 하면 보이지 않는 꽃 그러나 환한 상처가 되어. © 김정기 2009.11.23

목요일 외출 / 김정기

목요일 외출 김정기 노란 우산을 펴 들었다 얼마만인가 비 오는 날 홀로 외출이 우산위로 11월 중턱의 빗방울이 구슬 구르듯 흘러내린다. 가볍고 느린 트럭에게 길을 내주며 걸어가고 부딪히고 멈추어 선다. 매디슨 애비뉴 박물관, 떠난 사람들의 그림 앞에서 백년 전 구름 떼, 추수 끝낸 들판과 마주서서 시간의 옷섶을 만진다. 인간의 내심을 가는 선으로 빚어 놓은 조각들에게서 사람냄새가 물씬거린다. 결국세상을 떠나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의 분신을 만드는데 땀을 흘리는 것일까 샤갈의 색채를 바라보며 코트 깃을 세운 젊은 여자가 환한 침묵을 훔치고 있다 분주한 바깥거리에 서서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대의 하늘을 향해 노란 우산을 활짝 펴서 던진다. 던진다. 날린다. 날아간다. 빌딩숲 넘어 점 하나로. © 김정기..

11월에게 / 김정기

11월에게 김정기 나뭇잎에 가려 들리지 않던 먼 기적 소리 기침에 묻어 토해내는 맑은 울음 그대에게 가네 닿기만 하면 물이 되어 썩는 육신 씻어 첫 새벽 흔적 없이 잎 떨군 나무 가지에 올려놓는 바다 돌아오지 못할 항해에 배를 돌리는 11월 고요한 것이 꿈틀대며 세상을 덮는 황홀을 오후 네 시의 어두움을 만지며 朱黃볕 한 가닥 눈에 넣어 갈대 한 잎에 고인 이슬 되네 © 김정기 2009.11.07

10월 / 김정기

10월 김정기 내 몸이 나를 버리면 환한 빛살 타고 갈대밭을 건느리 더운 피를 삼키며 맞는 아침 죄 없는 새들이 모여서 마지막 등을 기대고 가을을 들킨 과실들이 얼굴을 붉히네 단풍나무 아래서 우리는 모두 유월 숲 흉내내도 10월의 발길에 떠밀려 가고 이제 당신이 떨 구고 간 이름 하나 앞가슴에 달고 바람 헤치며 어디로 날아 가야하나 내 몸이 나를 버리면 © 김정기 2009.10.22

잎새의 가을 / 김정기

잎새의 가을 김정기 지금 떨고 있다 햇살에 꽂히려고 몸을 비틀면 더욱 눈부시게 떨리는 침엽수 뾰족한 잎. 한 세상 부딪치며 잡던 손, 한번 다시 스치기만 하고 놓아 줄 것도 없는 키 큰 나무가 무서워 허공을 뛰어내리는 잎새의 곡 소리 안개도 문을 닫고 아는 기척도 없다. 분배된 땅에는 이름 짓지 않은 하늘이 여전히 푸르다. 빛나는 지난 날은 휘어서 삭아가고 떠나는 옷자락 부여잡고 엉킨 실 풀어놓으려 하니 어느 거대한 바람이 번져서 물결이 되어 후두둑 지난 날 빗방울도 데려오는 기나긴 잠이 든다. 숨겨두었던 날카로운 눈초리 한번 써먹지도 못하고 들켜버린 잎새의 가을. 조용하다, 적막조차 떨린다. © 김정기 2009.09.25

달걀 깨기2 / 김정기

달걀 깨기2 김정기 토요일 아침 달걀을 깬다. 둘이 부딪치면 하나만 금이 간다. 둘의 싸움에서 한쪽만 부서지는 세상 사람들 같다. 먼 바다로 돌아가는 물살은 급해서 햇살을 앗아가는데 결국 하나 남은 성한 달걀은 이긴 것 같았지만 싱크대 모서리에 소리 내며 깨져서 피 흘리게 마련이다. 들창 너머 후미진 곳에 어두움을 만들던 여름도 서서이며 늪지를 감돌고 토요일마다 달걀을 깨는 손 끝에 맺히는 울음 © 김정기 2009.08.25

계단 / 김정기

계단 김정기 꿈마다 계단을 허물고 평지를 만든다 다음날 다시 가보면 더 높아지는 계단 손톱에 피가 엉기도록 다시 허물며 밤을 지샌다 그래도 층계는 여전히 버티고 있어 약해진 발의 공포가 켜켜이 쌓인다 어디든 밀어내는 계단 앞에 매일 작아지는 나는 높은 곳을 바라보며 매일 자란다 밤마다 허무는 나의 손을 잡고 둥근 달의 인력으로 길을 내는 어렴풋한 빛이 어둠속으로 새어들어 황홀한 길을 펼처주고있다 닥아오는 계단을 달리듯 갈아엎고 가고 있다. © 김정기 2022.02.06

여름 강을 건너는 시간 / 김정기

여름 강을 건너는 시간 김정기 오후 땡볕을 달래는 강물소리에 여름을 덧입고 뒤 돌아보니 세상은 뜨겁게 달아 올라도 지나온 발자국은 차겁기만하다 목이 마른 바람 소리가 닥쳐온 계절의 옷깃을 잡고 오래 찢기고 바스러진 것들이 무성하게 푸르러 강물과 동행한다 가쁜 숨으로 적막을 조우하는 시간을 잠그고 조금씩 여름날을 베어먹는다 어지러운 증세가 녹아 강바람으로 떨리는 피안을 향해 손사래치며 일어서는 강물 문고리를 잡고 허기지고 삭은 오늘을 추스려 한 걸음씩 이 땅에 없는 빛으로 다가 간다 © 김정기 2021.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