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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조팝나무, 봄을 맞다

조팝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말만 들었지 당신이 조팝나무, 조팝나무 하면 나는 왜 마음이 조급해지나 오래 전부터 조팝나무가 오밀조밀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과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다 아무튼 나는 지금 조팝나무 건너편으로 보름달이 덜렁덜렁 굴러가는 소리를 듣는 있는 중이야 맛 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하는 당신 목소리에 3도 화음이 들어간다 조팝나무가 봄밤 복판으로 납신납신 걸어 들어온다 해서 내 마음이 제아무리 조급해져도 죽자고 참는 수밖에 별 다른 도리가 없다 © 서 량 2011.05.23 – 2021.02.26

2021.02.26

|詩| 꽃단장

하늘이 먹구름을 덮는다 구름 건너편 세상 모퉁이가 보일까 말까 싶은 날 커다란 물고기가 깊은 당신 속에서 흐느적거립니다 커다란 물고기가 입 양쪽 가장자리에 긴 수염을 흔들며 두루두루 어둠을 탐색합니다 커다란 물고기는 거동은 향방이 뚜렷합니다 아까부터 진눈깨비가 오려나 했지요 진눈깨비에 대한 예측이 들어맞았어 세찬 바람이 고개를 드는 지축으로 진눈깨비가 휘몰아칩니다 꽃비, 꽃비가 쏟아집니다 휘날린다 하늘이 열리면서 구름 건너편이 보여요 화려해, 아주 화려해! 대지가 온화해지고 있어요 © 서 량 2021.02.25

2021.02.25

|詩| 옆집

막다른 골목길에서 어린애들이 뛰노는 장면이야 옆집 사람이 집에 없는 저녁 녘 응접실에서 알토 색소폰 소리 들리나 봐요 입술이 아프게, 아무래도 입술이 갈라지도록 고음을 처리하기가 힘이 들었던 모양이지 바람 부는 대로 어쩜 박자도 척척 맞게 머리칼을 휘날리며 어린애들이 줄넘기를 하고 있잖아요 그건 아주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었어 비브라토가 가을 햇살로 일렁이면서 더더욱 스멀스멀 내 앞섶을 파고드네, 나는 중저음의 떨림이 좋아, 작은 실수로 앙칼진 소리라도 내면 절대 안 된다, 하는 듯 알토 색소폰 구성진 멜로디가 울려오는 곳이 꼭 옆집 응접실 같아요 © 서 량 2019.08.17

2021.02.05

|詩| 옆방

색소폰 소리 같기도 해 미닫이 문이 조심스레 열리는 참 반가운 기척인지도 몰라 들려요, 분명한 저음으로 속 깊은 충격을 감춘 채 바로 옆은 아니지만 옆이 아니더라도 여태 나를 멀리했던 내 유년기 갈대 숲 우거진 해변 소나무 여럿이 듬성듬성 말없이 서있는 곳 같기도 해 바람결 문풍지가 부르르 떨렸는지도 몰라 느껴요, 분명한 테너 색소폰 멜로디가 검푸른 파도로 밀치고 밀리면서 바로 옆에서 귓전을 때리는 이 마구잡이 저음의 엄청난 위세를 © 서 량 2019.07.22

2021.02.04

|詩| 편안한 마음

키가 큰 떡갈나무가 내 그림자를 보듬어 주는 한나절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바람 부는 봄날 어느 날 떡갈나무 몸체를 애써 붙잡아주는 내 거동이 이상하다 느슨해진다 키가 큰 떡갈나무가 번쩍이는 해와 달 반대쪽 그 자리에 마냥 우두커니 서서 그냥 그대로 지복(至福)을 누릴 것이야 봄이며 겨울이며 별로 가리지 않고 정신병동 폐쇄병동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먹은 후 내가 창밖을 내다볼 때 같은 때 © 서 량 2017.05.05 - 2021.01.19

2021.01.19

|詩| 치고 들어오다

치고 들어오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라 -- 비트겐슈타인 1월을 맞이하라 시간이 두 조각으로 갈라진다 헐벗은 떡갈나무 가지 쪽으로 당신이 눈길을 옮기는 사이에 지금 내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요 걸핏하면 발끈하기 갈등관계 지탱하기 일부러 밀어붙이기 서로를 감염시키기 1월을 공격하라 맞받아 치는 사이에 아픔은 사라진다 당신의 슬픔이 침묵 속에 가라앉는다 시간이 떡갈나무를 냅다 흔드는 동안 © 서 량 2021.01.15

2021.01.15

|詩| 대형사고

겨울이 싸락눈을 감싸 안고 아무 생각 없이 부서지는 광경이다 꺾어진 겨울 나무 잔가지를 보십시오 밤 사이 대형사고가 터진 것이 틀림 없습니다 겨울 감상법은 진정 당신 마음 하나에 딸렸어요 나무와 바람과 하늘이 한 판 크게 어우러지는 새벽이잖아요 시린 코를 하얀 마스크로 덮은 겨울이 바람 속에서 잔기침을 하는 풍경이다 아무래도 겨울을 숙청해야 되겠어, 하며 당신은 내게 낮게 속삭인다 들숨이 잦아든다 © 서 량 2020.12.17

2020.12.18

|詩| 굳은살

우르르 몰려드는 푸른 세포들 싱싱한 줄기세포들이 사방을 살피는 동안 면역이 생긴다 면책특권의 쾌락 당신 살결이 연회색이었다가 차츰차츰 보라색으로 변하는 거다 벌판에 바람이 불고 있어요 깃발 나부끼는 소리가 귓전에 아른거리네 싱싱한 줄기세포들이 바로 백혈구의 전신이었어 발바닥에 불이 붙었네 정신이 아뜩해 생살 터지는 분홍빛 세포막은 무통분만이다 심한 격전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을 거에요 길고 힘겨운 겨울을 치르는 동안 당신 가슴에도 서서히 굳은살이 박일 것이다 © 서 량 2020.12.06

2020.12.07

|詩| 와사비 푸른 콩

짙은 녹색이 청색에 가깝다 함박눈이 아무 때나 펑펑 쏟아진다 기약도 없이 새벽 4시에 간식을 먹는다 밖에서 무슨 일이 터지는지 더 이상 관심을 쏟지 않아도 돼 자폐증의 즐거움과 짙푸른 녹색이 서로 결이 잘 맞아요 앞서 말했듯이 꼭 그러라는 법은 없습니다 눈 시린 실내에 온통 오렌지 계통의 빛이 넘쳐나고 있어요 어찌 생각하면 속이 쓰릴 만도 하지 약손가락 손톱보다 좀 작은 크기 푸른 콩들이 막 뛰어다니네요 등을 잔뜩 꼬부린 태아 모습들 등을 잔뜩 꼬부린 생선 모습들 나는 어느새 와사비와 호흡이 척척 맞는다 ©서 량 2020.11.27

2020.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