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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사과를 위한 터무니없는 변명

사과를 탓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일일 거다 한입 맛본 후 덤벼들어 더 깨물어 먹고 싶은 새빨간 사과가 자타가 공인하는 내 삶의 과녁일망정// 사과는 내 무모한 사랑을 독차지한다// 황망한 시련의 끝머리에서 사과가 세차게 흔들린다 미련을 버려라 미련을 버리거라// 나는 사과를 욕보인다 앞뒤관계가 맞지 않는 순간에 설익은 논리의 틀을 홀랑 벗어 던지고 전혀 예기치 못한 자세를 취하면서 톡톡히 반항을 할지언정 © 서 량 2011.06.12 – 2021.04.08

2021.04.08

|詩| 달콤한 꿈

꿈에도 법칙이 있대 꿈을 지 마음대로 꿀 수 있다며 나를 달콤하게 유혹하는 책을 읽었어 우리는 모두 한결같은 드림프로듀서 당신도 나도 밤이면 밤마다 지 구미에 맞게 꿈을 꾸민다는 거지 배경음악이 꺼림직하다 중간중간에 들린다 캄캄한 창세기 이후 내내 혼자 중얼거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 세상에나, 지 뜻대로 꾸민 천연색 꿈을 관람할 수 있다니요 푹신푹신한 소파에 거의 누운 자세로 앉아서 지루한 설명 부분일랑 건성건성 넘어가고 달콤한 장면만 골라서 즐기면 되겠네, 안 그래요? © 서 량 2009.11.11 – 2021.04.06

2021.04.06

|詩| 봄詩

종려나무가 뿌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물구나무서기를 했거든요, 아까요 몸매 날렵한 종달새 몇 마리가 저쪽으로 황급하게 날아갔어요 반짝이는 강변 조약돌도 겨우 내내 땅바닥에 누워있던 눅눅한 낙엽들도 죄들 다 들뜬대 그럼 안돼, 하며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쳐도 안 통해요 볼썽사나워, 볼썽사나워라 나도 내친김에 나 몰라라, 하면서 서늘한 봄 품에 냉큼 안길까 하는데 © 서 량 2008.04.18 – 2020.02.14 - 2021.03.31

2021.04.01

|詩| 맨해튼 봄바람

봄바람 부는 날 쪽배에 탄 채 강물에 떠내려 갔지요 물결도 내 몸도 내내 가벼웠어요 둥둥 떠내려 갔지요 맨해튼은 가벼운 섬입니다 맨해튼은 생김새가 꼭 고구마 생김새예요 맨해튼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모두 얼굴이 고구마 모양이잖아요 자세히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바람이 목 언저리를 자꾸 파고드는 날 당신과 내가 수소, 산소, 질소, 탄소가 되어 하늘에 둥실둥실 떠다닙니다 맨해튼을 사랑하기 때문인가요 봄바람이 연거푸 불어오는 날이면 © 서 량 2008.04.14 - 2021.03.29

2021.03.29

|詩| 너무나 잠시예요

맞아요 봄이 너무 짧아요 거친 숨을 죽이면서 배로 호흡하는 유년과 성년의 틈새처럼 양지 바른 웅덩이 미지근한 흙탕물에 질주는 올챙이 떼처럼 무례한 사춘기처럼, 무례한 사춘기처럼 선잠에서 깨어난 깨알만한 풀꽃 씨앗과 다리가 부러질 듯한 사슴들이 춘곤증에 시달려 얼떨떨해하는 동안 내 곁을 훌쩍 지나치는 봄! 파도 치는 여름보다 코끝 빨개지는 겨울보다 앞가슴 실밥이 뜯어져, 앞가슴 실밥이 탁! 뜯어져 마음 상하는 가을보다 훨씬 더 짧아요 아닌가요? 아닌가요? 바람 부는 아침에 앞산 뒷산이 발칵 뒤집히는 이 봄이 너무나, 너무나도 잠시라는 게 © 서 량 2009.02.17

2021.03.28

|詩| *카타토니아

숲이 긴장하는 순간 돌개바람이 불어온다 미생물은 우울하다 미생물이 얼어붙는다 미생물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립니다 미생물이 난데없이 우울증을 벗어나네요 첨벙, 강물에 뛰어드는 당신은 열대성 돌개바람 속 원시인 중증 정신질환자다 주기적 긴장증(緊張症)의 노예 옴짝달싹 하지 않는 미생물 숨도 쉬지 않는 생명의 노예다 * Catatonia – 두뇌활동이 정상이지만 대화를 시도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정신질환 증세, 때로는 몸 동작도 정지된 상태를 유지한다 © 서 량 2021.03.25

2021.03.25

|詩| 절대고독

나도 당신만큼 청승을 떨고 싶다 추석날 밤쯤 둥근 달을 쳐다보며 그렇게 눈물을 흘렸으면 분당 화장터에서 아버지의 혼백 가루를 가슴에 품은지 며칠 후 신세계 백화점에 꽉 들러붙은 영등포 타임 스퀘어의 겉으로는 아주 멀끔한 중국집이었다 2012년 8월 어느 날 저녁 대학 동기동창 열 몇이 같이 먹고 술 마시고 떠들었던 곳이 거기였다 지금껏 지 생명의 숨길을 지 스스로의 힘으로만 지탱해 온 걸로 마음 놓고 착각하며 야 너는 이제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전혀 못 알아보겠다 하며 자꾸만 웃어대던 곳이 바로 거기였다 그때 참으로 이상한 꽃 냄새를 푹푹 풍기는 고량주가 나왔는데 술 이름이 절대고독이었고 나는 절대로 고독하지 않았다 시간이 유유히 상승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그렇게 당신만큼 뜨거운 눈물을 흘렸으면 © 서 ..

2021.03.19

|詩| 청동, 봄의 왈츠

벌거벗고 앉아서 손으로 턱을 고이고 생각하는 사람, 로댕의 애인 까미유 끌로델 작품 왈츠, 헐벗은 남녀는 시퍼런 청동이다 말년 30년을 정신병원에서 썩은 끌로델, 작년 1월에 아마존에서 $96 주고 산 청동 덩어리, 집에 불이 난 후 전셋집에서 사는 동안 식탁에 놓여 있던 조각품, 반질반질하다 지금은 내 책상 위에서 부동자세로 춤추고 있는 11인치 크기의 헐벗은 남녀 정신과 월간 신문, 2021년의 낙관적인 예후를 대서특필한 표지가 고개를 드는 모습, 바로 그 밑에 실린 의사 자살 기사, 신문은 일반인들보다 44% 높은 의사 자살률을 한탄한다 1년에 400명이 하루에 한 명 꼴로 스스로 죽는다지 저는 정신병원에 감금된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해요 신문이란 한갓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로댕의 ..

2021.03.16

|詩| 옛날 기차가 서있는 풍경

기차가 달린다 턱시도 컬러 숯검정이 아닌 기차는 보라색, 플러스 나풀대는 해바라기 꽃잎 기차가 와장창 골을 때리네 기차는 알록달록하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부동으로 서있는 기차를 나는 사랑할 수 없어 제발 그러지 마 플리즈 기차가 서있는 풍경의 배경음악이 문제가 될수 있지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 멜로디는 따분해 저는 정말 그때만은 예외적으로 재즈 음률이 좋았습니다 무진장 기차가 시평(詩評) 받기를 거부한다 기차는 애오라지 기차일 뿐, 그런 기차가 기똥차게 달린다 격식이 없이, 격식이 없이 © 서 량 2011.03.02 - 2021.03.14

2021.03.14

|詩| 철도관사의 추억

양말 뒤꿈치가 해어지면 할머니가 양말 속에 죽은 전구를 얼굴이 통통한 전구를 깊숙이 집어넣고 따끔한 바늘 끝으로 콕콕 찌르면서 내 비언어(非言語)를 기워주신다 할머니가 종아리 어깨죽지 팔꿈치며 내 불온한 육체에 골고루 신경을 쓰시는 중 만지작거리는 당신 셋 째 손가락만 한 크기 에무왕(M1) 총알, 내 유일한 장난감 시어(詩語)! 끝내는 내 손안에 들어온 불발탄 에무왕 총알 꽁무니 복판에 새빨간 점이 찍힌 에무왕 총알 에무왕 총알 뾰족한 얼굴 외에도 내 젊은 아버지 청량리 철도관사 앞뜰에 떨어진 못, S자로 구부러진 대못도 소중한 장난감이다 내 훌륭한 비속어(卑俗語)! © 서 량 2007.08.09 - 2021.03.05

2021.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