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창밖의 꽃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가 순전히 내 뜻대로 예쁘다 해도 괜찮은 꽃 서슴없이 태어나서 언뜻 보기에도 향기롭고 눈을 감고 있는 내내 활짝 개였다가 젖빛으로 뭉그러지는 구름 너머 날갯짓 가볍게 이내 사라지는 향기 한참 그득한 꽃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리면 직사각형 위쪽 대부분이 하늘로 덮여 흔들리는 창문 밖 조그만 꽃 한 송이 © 서 량 2020.02.20 詩 2020.02.21
|詩| 나는 3연음을 사랑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느린 3박자를 마다하고 로코코 스타일 숨 가쁜 왈츠로 한쪽 맨살 어깨가 기우뚱하더라도 찻차차 찻차차 슬로우 록 발라드 풍 3연음 날갯짓이 좋기는 해요 근데 아주 빠른 8분의 6박자 워싱턴 포스트 마치에 처그적 척척 처그적 척척 나랑 발 맞추어 나란히 꼿꼿하게 걸어가는 건 어때요 겨울 해변도 괜찮아 3연음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점점 더 심해지는구나 하고 느끼기가 무섭게 더 세차게 달려드는 파도를 눈을 반쯤 감은 채 그윽이 바라보더라도 우리가 © 서 량 2020.01.11 詩 2020.01.12
|詩| 두 개의 시계탑 두 개의 시계탑 -- 미주 서울의대 시계탑 문집 6집 발간을 위하여 45년 전에 태어났다 울음소리도 왕성하게 노용면 선배님이 위대한 산파였다 뉴욕에서 발생한 일, 그 나이라면 기력이 한참 좋을 때라네 눈에 서울 종로구 대학로 101 시계탑 눈에 미주 서울의대 동창회지 시계탑 자꾸 밟히네 예나 지금이나 늘상 시계탑을 맴도는 청운의 뜻 새롭고, 새롭고 또 새롭다 미대륙의 중추신경으로 뿌리박은 굵직굵직한 기둥, 기둥, 기둥들 시계탑 문집 제 6집 표지에 손을 얹는다 끝없이 자랑스러운 우리의 고뇌와 희열 시계탑이여 아, 저 영원한 지침이여 © 서 량 2019.12.4 詩 2019.12.10
|詩| 씨족사회 - 서울의대 졸업 50주년기념 관광여행 중 씨족사회 --- 서울의대 졸업 50주년 기념여행 중, 경주에서 양동마을을 가을바람이 휘감아 오른다 무 배추 지렁이는 고사하고 마을 사람 눈 코 귀에 맴돈다 소문이 소문에서 그친 것만은 아니었다 서원과 기와집을 다투어 세워가며 이름 석자를 남기려는 속셈이었지 양동마을 양반동네 종.. 詩 2019.10.20
|詩| 피아노, 그리고 혼잣말 5월 끝자락을 바람이 쓱 훑어 지나가네요 5월이 숲으로 재빨리 잦아드는 걸 보고 있어요 다시는 5월이 날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정말 가슴이 푹 파였지만 피아노는 대충 정갈한 옷차림이다 피아노는 손때가 반질반질하게 묻은 클라리넷에게 눈길을 던진다 자, 준비가 다 되셨겠지요 하.. 詩 2019.05.28
|詩| 안경 쓴 아이린 아이린이 병원문을 지킨다 눈으로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몸으로 문 쪽을 살피다가 호감이 가는 병원직원이 열쇠 꾸러미에서 문에 꼭 맞는 열쇠를 찾으려고 쩔쩔맬 때 얼른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준다 아이린은 영혼의 검색창에 ‘진실’이라 써넣는다 나는 그날그날 날씨에 관계없이 .. 詩 2019.04.26
|詩| 달팽이 몇 마리 시간이 당신을 아무리 재빠르게 지나친다 해도 이제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겠다 봄비가 내리고 있어요 병동 아득한 복도 끝에서 누군가 소리칩니다 몇 알의 신경안정제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 줌 햇살이 내 살갗에 와 닿아요 요즘은 하고 싶은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간간 남 생각을 하지 않는 우리의 나쁜 버릇을 어쩌나 싶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며 얼굴을 치켜드는 당신이 참 좋아요 나는 기꺼이 허무를 감싸 안는다 습기 그득한 시간, 시간의 갓길을 천천히 기어가는 연체동물 몇몇을 실눈을 뜨고 보고 있어요 이제는 어엿한 봄이 아닙니까 밖이 © 서 량 2019.03.25 詩 2019.03.25
|詩| 새벽에 비행기 한 대가 활주로를 박차고 이내 구름을 향해 비스듬히 돌진하는 철제의 새 한 마리 저 새는 뚜렷한 목적의식에 빠져있을 뿐 튼튼한 양 날개에 어둠을 밝히는 전기장치가 샛별만큼이나 화사하게 깜박인다 샛별이 내 균형감각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잘 견뎌내고 있는 중 철제의 새가 기우뚱 내 쪽으.. 詩 2018.12.28
|詩| 임플란트 랩 스타일 흐치흐치, 한 10년쯤 전인지 치과의사가 이빨 임플란트를 하라고 해서 그러마 하고 왼쪽 위쪽 어금니를 덜렁 빼 놓고서 그 치과의사가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게다가 나는 나대로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내깔겨뒀더니 글쎄 아래 어금니가 위쪽으로 나무가 자라듯이 쑥쑥 .. 詩 2018.12.10
|詩| 영주권 신청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는다 하늘에 침묵이 흐릅니다 데이트라도 하면서, 데이트를 하면서 잠깐 옆쪽으로 얼굴을 돌렸다가 남과 몸을 부딪치지 않으려고 다시 앞쪽으로 눈길을 던지는 내 모습이 보인다 비밀을 발설하는 재미에, 비밀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어깨도 나란히 .. 詩 2018.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