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등목 뼈아프게 쌓아온 정성이 무너지면서 당신이 자지러지는 광경인지 목이며 등뼈 줄기 언저리에서 흔히 터지는 일입니다 분노가 수그러지는 조짐일지 아무의 잘잘못도 아닐 수도 어떤 미적지근한 생각이라도 벼락치듯 작살나는 순간입니다 미음자로 사방이 막힌 한옥 마당에서 속 깊은 들숨 날숨을 멈추고 기역자를 45도로 엎어 놓은 몸집이 하늘 지붕을 든든히 떠받히는 순간 당신이 소스라치는 여름은 무탈합니다 © 서 량 2020.08.02 詩 2020.08.03
|詩| 나는 내 비서다 위험하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이디어라 불릴 가치조차 없다 -- 오스카 와일드 비서가 병원 복도를 뛰어간다 비서가 오른쪽 모퉁이로 사라진다 어제와 내일만 영원하다고 비서는 말한다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위험하다 x 표시 바로 옆에 정성껏 사인한다 SNS 비밀번호를 쪽지에 적어 놓는다 사무실 문이 육중하게 닫힌다 내 비서가 천둥 소리 사이로 냉큼 지나간다 그날 손에 꽃 몇 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내가 없는 나는 내 비서일 뿐입니다 나는 시방 위험한 아이디어입니다 ©서 량 2020.07.22 詩 2020.07.23
|詩| 맨해튼 북부 한 사람이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맨해튼 북부 웨스트 사이드 너절한 거리를 걸어간다고 쳐 꽃집도 몇 군데 있는 개는 개대로 바보처럼 기뻐하고 개 주인은 인생을 정중하게 탐색하는 태도를 포기한지 한참 됐다거나 아니면 찌릿한 마음의 평온 같은 거나 죽음에 접근하는 서늘한 평화를 좋아하는 법을 목하 체득 중이라고 쳐 개 주인이 아니야 꼭 그런 상황이 아니면 어때요 설정이야 아무렴 어때요 우리 처음부터 다시 해요 응 그래 한 사람이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맨해튼 북부 웨스트 사이드 한여름에도 늦가을인 듯 바람이 부는 거리를 개 다리 넷과 사람 다리 둘 도합 다리 여섯 개가 바쁘게 튼튼한 드럼 비트에 박자 맞춰서 쿵처적! 쿵척! 신나게 빠르게 걸어간다고 쳐 수정벽으로 쫘악 둘러 싸인 용궁 속에 앉아 적적한 바다 밑을.. 詩 2020.07.05
|詩| 오픈카 하늘이 낮게 내려 앉은 어느 날 한여름이 옷깃을 여미는 오후 새 몇 마리 짙은 회색 구름 너머로 조그맣게 날아가는 어느 날 바람이 갈대 숲에서 잠시 숨을 죽였지 갈대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갈대들이 아무런 내색함이 없이 바람을 조용하게 일으키고 있었지 바람 한점 없는 들판 비포장 도로에 빨간색 오픈카 한 대 한동안 서 있었지 © 서 량 2020.06.25 詩 2020.06.25
|詩| 가상현실 내 밑바닥에 누워있는 당신의 진실을 보았다 한편의 시를 쓰고 싶은 욕망 때문에 눈을 감는 순간 매서운 채찍질과 빠르고 음산한 배경음악에 박자 맞추어 온몸으로 눈보라를 뚫고 질주하는 저 북극의 개, 울부짖는 늑대 떼보다 몇배 더 성급한 개떼, 내가 개 여러 마리로 길길이 둔갑하여 썰매를 끌고가는 흑백의 화면을 보았다 한밤중에 한껏 지구를 가로지르고 싶은 내 주인의 희열을 위하여 © 서 량 2017.03.30 --- 2020.06.07 詩 2020.06.08
|詩| 꽃과의 대화 꽃이 밑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꽃이 더러운 흙으로 귀순하는 숙명을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일까, 아닐까 꽃에게 내가 묻는다 "꽃아, 너는 왜 그렇게 전신을 다 드러내고 땅으로 뚝뚝 떨어지는 흉한 모습을 내게 보여주느냐?" 이윽고 꽃이 응답한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이지만 전혀 흡족한 반응이 아니지만 꽃의 말을 나는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런 어려운 질문에 내가 대답할 수 있다면 처음부터 아예 나는 꽃으로 태어나지를 않았을 거예요!" © 서 량 2009.05.08 --- 2020.05.30 詩 2020.05.30
|詩| 비디오 렌즈와의 대화 당신은 가상현실이다 진한 향기에 흠뻑 젖은 볼록렌즈 건너편에 가만가만 모로 누워있는 어두움의 평화다 렌즈 속 어둠이 통째로 움직인다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알 수 없는 조그만 어린애가 나를 응시한다 눈은 강아지 눈에 양손 양발이 춤추는 금붕어 화려한 지느러미다 © 서 량 2020.05.13 詩 2020.05.13
|詩| 수퍼 핑크 문 2020년 4월에 수퍼 핑크 문이 둥실 두둥실 뜬대 손만 뻗치면 커다란 분홍색 달을 만질 수 있대 얼마든지 2020년 4월 8일 앞마당에 꽃잔디가 펼쳐질 때쯤 수퍼 문을 건드릴 거다 지구 그림자가 어디로 사라지고 없고 앞마당도 사라지고 없고 분홍색 꽃잔디가 궁창에 붕 떠서 내 전신을 감싸줄 때쯤 달이 지구에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와 평소보다 7 퍼센트 더 크게 16퍼센트 더 환하게 당신 눈과 이마를 적셔줄 거다 2020년 밤이면 밤마다 지구가 신음 소리를 낸대 지구가 너무 아파하니까, 2020년 4월 8일 밤에 수퍼 핑크 문이 하늘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거래 ©서 량 2020.03.31 詩 2020.03.31
|詩| 하늘색 마스크 독수리 여러 마리 훨훨 날아간다 매서운 눈초리로 세상을 훑어보는 중 우리는 더 이상 하늘을 우러르지 않는다 거대한 천체의 그림자가 하늘을 덮는 동안 지구는 연거푸 옆구리에 손을 대고 기침을 합니다 기침 소리가 어느사이엔가 어스름한 저녁 녘 로마사람들이 거리에서 부르는 스타카토 혼성합창 소리로 왕왕 울리는 중이다 팔을 안쪽으로 V자로 보기 좋게 꺾고 옆으로 눕혀 당신을 툭, 치면서 팔꿈치 인사를 하는 동안 비린 꽃망울 내음이 코끝에 스친다 © 서 량 2020.03.15 詩 2020.03.16
|詩| 봄비의 반란 봄비의 숨결이 거칠다 조그만 사각형을 클릭하면 쐐기 모양의 체크마크가 고개를 치켜드는 내 컴퓨터 모니터에 봄비가 줄줄 내린다 봄비가 아프다 봄비는 순순히 자연의 법칙을 따를 뿐 당신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렇지 않다고 속삭인다 소프트웨어를 받아드리는 기본방침에 동의하는 봄밤에 봄비의 숨결이 깊어진다 봄비의 잔물결이 참 좋아요 봄비의 어깨가 체크마크 모양으로 한쪽으로 치우치다가 불현듯 치솟는다 나를 한사코 거부하듯 봄비가 지붕을 탕탕 때리는 봄밤이면 © 서 량 2020.02.29 詩 2020.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