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생강을 위한 생강스러운 생각 생강나무에서 생강 냄새 나나 생강꽃에서도 생강 냄새 나나 생강향이 섞인 자스민 같은 향기가 난대요 달걀 모양으로 갸름하게 생긴 생강나무 잎새도 생강 향기를 풍기나 생각에서도 생각 냄새가 나나 생각스러운 생각을 타박상에 북북 문지르면 생각의 피부가 알싸해지고 먹으면 메슥메슥한 속이 싹 가라앉는 생강 향기 속으로, 미확인비행물체 하나 유유히 번쩍번쩍 날아가는 새벽녘 © 서 량 2021.05.22 詩 2021.05.22
|詩| 밤의 노래 습도 백 퍼센트 되는 새벽쯤 해서 끈적한 수증기로 사라지리라 먼 은하수 돛단배 뱃노래 에헤야 데야 일렁이며, 일렁이며 당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굵다란 첼로 멜로디와 내 창문을 때리는 팀파니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 주먹만 한 두 눈이 얼굴을 완전히 차지한 자궁 속 태아가 머리를 숙이면서 예쁜 생선 등골이 C자로 휘어지는 먹물 하늘에 몸을 던진다, 기꺼이 던집니다 베토벤 심포니 9번 4악장쯤 해서 젊음을 벗어난 바리톤이 냅다 소리치는 한밤, 기나긴 순간에 © 서 량 2018.10.01- 2021.05.19 詩 2021.05.19
|詩| *하고재비 그늘에서 울려오는 소리 뒷마당 떡갈나무 잎새 검푸른 그림자 떨림 마구잡이로 심계항진을 일으키는 떡갈나무 어, 어, 어! 하는 사이에 말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푸릇푸릇하기만 하더니 이제 빨리 흥분하는 우거진 녹음의 자유분방 그늘진 잎새가 푸르름의 합창을 묵음처리 합니다 잘한다, 잘한다! 하며 초록을 부추기는 소리 마침내 확연히 들려요 떡갈나무 몸체가 사납게 내지르는 탄성, 수목의 본성! * 무슨 일이든지 안 하고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경상도 말 © 서 량 2021.05.16 詩 2021.05.17
|詩| 바다의 음향장치 입술 잔주름 실핏줄이 바닷바람을 부른다 입술은 참 민감해 누가 스피커를 꺼 놓았을까 입술만한 크기의 잎사귀가 넘실거려요 저 멀리 육지가 올리브색으로 가물거려요 당신은 한쪽 눈을 감은 채 영상을 찍는 중 거무튀튀한 조각배 하나가 파도를 무마시킨다 숨이 막히도록, 숨막히게 당신이 먼저 바다를 그리워하지는 않기로 했지 입술만한 크기의 잎사귀가 네이비 블루 바다를 짐짓 제압하는 가운데 © 서 량 2021.04.30 詩 2021.04.30
|詩| 농축된 생각이 풀어질 때 詩는 찾아가는 게 아닐까요 내가 부르면 詩가 내게로 달려오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지 詩가 나인지 내가 詩인지 헷갈려요 둘이서 티격태격 억지를 부리는 대목입니다 두 쪽, 세 쪽, 네 쪽으로 조각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당신에게 횡설수설하고 싶어 대화의 엑기스를 파악하기 힘들어요 詩는 대화다 내 상투적 의식의 배경을 없애는 수법으로 내 詩語에 당신의 詩語를 합치는 기법으로 뮤즈의 내실에 노크 없이 들어간다 당신이 연주하는 주제와 변주곡이 멋져요 나는 농축된 詩, 꿈이다 © 서 량 2021.04.2 詩 2021.04.23
|詩| 야광시계 팬클럽 순전한 야행성이다 야광시계가 그렇다 당신은 어둠 속, 내 동떨어진 현실을 일깨우는 연락장교다 야광시계를 논란의 대상으로 삼아 정기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가칭 야광시계 비평가협회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어 국제PEN클럽 식으로 곧 뉴욕에도 지부가 생길 거래 어머나, 참 기가 막혀서 나는 야광시계 왕팬인데 세상에 무슨 그런 할 일없는 사람들이 있대요? 당신은 침대 옆 탁자 위 결가부좌 자세다 야광시계가 그렇다 지금이 몇 시지? 하며 어둠 속, 내 동떨어진 실체를 파악한 후 나는 다시 꿈길에 접어든다 © 서 량 2021.04.18 詩 2021.04.18
|詩| 꿈꾸는 벽시계 벽이 시계와 밀착한다 해변의 추억이 뒤집힌다 파도가 인다 지금은 밀착의 시각 시계의 꿈이 일그러지고 있었어요 시간이 신음한다 웃음을 터트렸어 꿈은 전생의 찌꺼기임이 틀림없대 시간은 마호가니 프레임 안팎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서성이는 외로움이래요 파도가 죽는다 바닷물이 참 따스해 당신은 내 응접실에 안치된 마호가니 프레임이다 종일토록 하릴없이 뎅~ 뎅~ 종소리를 토해내는 © 서 량 2021.04.16 詩 2021.04.17
|詩| 차꿈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몰라서 한참을 절절매다가 꿈을 깼다, 불안했어 다시 같은 꿈으로 돌아갔는데 다시 차를 찾지 못하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똥꿈이 재수가 좋대, 돼지꿈도, 많이 우는 것도 현실보다 더 현실스러운 꿈 캄캄한 우주 끝 간 데까지 비추는 고성능 헤드라이트 제멋대로 나다니는 환상의 차 내 지극한 원심력(遠心力), 앞으로 그런 꿈을 차꿈이라 불러야겠어 차를 찾아 주차장을 헤매는 꿈이 재수가 참 좋대 © 서 량 2007.08.26 - 2021.04.14 詩 2021.04.14
|詩| 자두를 위한 미세한 공명 -- 생각과 실체 사이에/ 몸짓과 행동 사이에/ 어둠이 드리운다 -- 티에스 엘리엇, ‘텅 빈 사람들’에서 자두 껍질의 검붉음은 속생각을 감추기 위한 몸짓이다 사람을 꽃 대하듯 하는 다정한 눈길, 자두가 당신이 아니라는 전갈을 괭~ 괭~ 전해주는 괘종시계가 저는 참 좋아요 자두의 행간(行間)을 휘젓는 막역한 행동이 © 서 량 2021.04.11 詩 2021.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