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유효기간 수도꼭지가 콜록콜록 옆구리로 기침하면서 수압을 다스리고 있다 터질 듯한 충동에 맞붙어 똑, 똑 떨어지는 땀방울 이슬방울, 뿌듯한 물방울들 수도꼭지는 진작부터 짠 물결 넘실대는 바다가 그리웠다 © 서 량 2007.07.10 詩 2007.10.13
|詩| 복식호흡에 대한 서정 횡격막이 폐를 들썩이는 만큼 갓난아기 호흡법으로 배가 볼록볼록 나왔다 들어갔다 해야 해. 당신도 청순한 가을을 마시고 싶다면야 모름지기 아랫배가 초생달 모습으로 들쑥날쑥 해야 해. 독수리처럼 화급하게 도마뱀처럼 음흉하게 잊혀지는 사랑처럼 질박하게 그렇게 은밀하게 숨을 쉬어야 해. 팔.. 詩 2007.10.06
|詩| 소통** 가을에 나무들이 심심해서 너무나 심심해서 엉덩이를 흔들다 보면 나무들 가녀린 머리칼도 덩달아 흔들린다 당연하지 정말이다 가을에는 구름 땅 굴뚝 아스팔트도 하다못해 당신의 연심도 모조리 흔들린다니까 주홍색 앞가슴에 눈이 부리부리한 이름 모를 새 몇 마리 내 앞마당 허공에.. 詩 2007.10.05
|詩| 북소리* 고등학교 뺀드부에서 대북을 솜방망이로 쿵쿵 치던 놈이 있었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몸집도 실해서 아무도 그놈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걔는 지나갈 때마다 세상의 엄연한 실체들에게 쿵쿵 부딪쳤다 비와 눈과 우박과도 부딪치고 멜로디와 박자와 사랑과도 좌충우돌했다 그럴 때마다.. 詩 2007.10.01
|詩| 낙엽과 색소폰 9월 말에 나뭇잎 하나 간들간들 떡갈나무 꼭대기에서 땅으로 떨어졌지 저 나뭇잎은 정신병자도 아닌데 겨울도 오기 전에 화끈하게 벼랑에서 몸을 던지네 했더니, 이번에는 나뭇잎 두 개가 한꺼번에 하늘하늘 박자 맞추어 함께 떨어지는 거 있지 깜작 놀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니까 떡갈나무 잎새들.. 詩 2007.09.16
|詩| 체감온도 몸으로 새벽 온도를 잰다 서늘한 새벽의 혀 밑에서 금방 올라가는 수은주 높이가 내게는 중요한 안건이다 정서의 높낮이는 본능의 영향을 받는답니다 체온도 서정 때문에 자주자주 오르락내리락 한답니다 에어콘이 자동으로 꺼지고 호흡이 고르고 규칙적이었다가 잠꼬대 비슷한 소리 얼른 들렸다가 다시 잠잠해지는 내 침실 밖 개암나무 잎사귀가 눅눅해지는 새벽, 그런 새벽 체온일수록 터무니없이 올라간다 © 서 량 2007.08.16 詩 2007.09.14
|詩| 여우비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다가 열 살 때 여름방학에 아버지에게 끌려간 본적지 할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 홀로 초가집에서 사시던 시골에서 어느 날 산에 혼자 올랐다가 확실히 알았어 사람이 죽었다는 게 바로 저런 거구나 하는 거 키 작은 소나무들 새살거리는 산언덕에 허연 광목천막을 쳐 놓고 어른들이 웅성웅성 막걸리를 마시다가 나한테 떡 몇 개를 줬다 나는 허기진 강아지처럼 맛있게 떡을 먹다가 뭔가 이상하더라 어렴풋하게 이제야 기억 나네 몇몇 얼굴이 수척한 남자들이 삼베 옷을 입고 있었던 거 천국과 지옥을 구슬피 맴도는 구름 몇 점 빼 놓고 그날 하늘이 참 맑았는데 갑자기 가냘픈 빗방울 질질 쏟아졌어 누군가 꿈결처럼 “여우비가 내리네!” 했다 그때 나는 화려한 꼬리치마를 입은 여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살결이 .. 詩 2007.09.10
|詩| 개기월식** 평생에 한두 번 달 그림자가 해를 완전히 가려서 당신 마음도 내 몸도 속 깊은 지층에 박힌 석탄처럼 새까매진다 하던데 그 순간 무지개도 단풍도 순한 눈매의 꽃사슴도 삽시간에 총총 사라진다 하던데 개기월식 때 개가 짖는다고 했었나 지구의 사랑이 달을 온전히 덮치면서 별안간 달.. 詩 2007.09.06
|詩| 은수저 도둑* 서울 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 도선동 테두리가 미음자로 생긴 한식집에서 빗장이 내 넓적다리보다 굵은 대문 지나 중문 옆 목욕탕 가마솥 물을 일 년에 몇 번 펄펄 끓여 궁둥이 따끔하게 온 식구가 순번대로 목욕을 했다 장마철이면 부엌 아궁이에 물이 콸콸 고였다 누가 밤에 은수저를 .. 詩 2007.09.01
|詩| 홈디포(Home Depot) 가는 길** 엊그제 토요일에 홈디포에 전구며 못이며 이름도 모르는 연장을 사러 가다가 난생 처음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대낮에 들었습니다 나무와 숲이 음산하게 우거진 길이었지요 귀뚜라미는 가을 밤에만 우는 것으로 알았는데 귀뚜라미는 밑도 끝도 없이 고향 생각이 나게 하지요 그런 귀뚜라미가 벌건 늦여름 햇볕이 쨍쨍한 대낮에 우는 거에요 귀뚜라미건 사람이건 우는 거와 노래를 부르는 거가 대동소이하다는 결론을 내려도 좋아요 괜찮아요 귀뚜라미에 대한 선입관을 고치기로 했습니다 귀뚜라미도 매미처럼 대낮에도 운다 이겁니다 잘은 모르지만 비 내리는 새벽에는 아마 울지 않을 거라고요 근데 큰 확신은 없어요 귀뚜라미는 낮에도 울고 밤에도 울고 하니 귀뚜라미는 잠은 언제 자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새벽에 자나 혹시 전혀 잠을 자지 않는 .. 詩 2007.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