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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체감온도

몸으로 새벽 온도를 잰다 서늘한 새벽의 혀 밑에서 금방 올라가는 수은주 높이가 내게는 중요한 안건이다 정서의 높낮이는 본능의 영향을 받는답니다 체온도 서정 때문에 자주자주 오르락내리락 한답니다 에어콘이 자동으로 꺼지고 호흡이 고르고 규칙적이었다가 잠꼬대 비슷한 소리 얼른 들렸다가 다시 잠잠해지는 내 침실 밖 개암나무 잎사귀가 눅눅해지는 새벽, 그런 새벽 체온일수록 터무니없이 올라간다 © 서 량 2007.08.16

2007.09.14

|詩| 여우비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다가 열 살 때 여름방학에 아버지에게 끌려간 본적지 할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 홀로 초가집에서 사시던 시골에서 어느 날 산에 혼자 올랐다가 확실히 알았어 사람이 죽었다는 게 바로 저런 거구나 하는 거 키 작은 소나무들 새살거리는 산언덕에 허연 광목천막을 쳐 놓고 어른들이 웅성웅성 막걸리를 마시다가 나한테 떡 몇 개를 줬다 나는 허기진 강아지처럼 맛있게 떡을 먹다가 뭔가 이상하더라 어렴풋하게 이제야 기억 나네 몇몇 얼굴이 수척한 남자들이 삼베 옷을 입고 있었던 거 천국과 지옥을 구슬피 맴도는 구름 몇 점 빼 놓고 그날 하늘이 참 맑았는데 갑자기 가냘픈 빗방울 질질 쏟아졌어 누군가 꿈결처럼 “여우비가 내리네!” 했다 그때 나는 화려한 꼬리치마를 입은 여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살결이 ..

2007.09.10

|詩| 홈디포(Home Depot) 가는 길**

엊그제 토요일에 홈디포에 전구며 못이며 이름도 모르는 연장을 사러 가다가 난생 처음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대낮에 들었습니다 나무와 숲이 음산하게 우거진 길이었지요 귀뚜라미는 가을 밤에만 우는 것으로 알았는데 귀뚜라미는 밑도 끝도 없이 고향 생각이 나게 하지요 그런 귀뚜라미가 벌건 늦여름 햇볕이 쨍쨍한 대낮에 우는 거에요 귀뚜라미건 사람이건 우는 거와 노래를 부르는 거가 대동소이하다는 결론을 내려도 좋아요 괜찮아요 귀뚜라미에 대한 선입관을 고치기로 했습니다 귀뚜라미도 매미처럼 대낮에도 운다 이겁니다 잘은 모르지만 비 내리는 새벽에는 아마 울지 않을 거라고요 근데 큰 확신은 없어요 귀뚜라미는 낮에도 울고 밤에도 울고 하니 귀뚜라미는 잠은 언제 자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새벽에 자나 혹시 전혀 잠을 자지 않는 ..

2007.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