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 126

비수 2 / 김종란

비수 2 김종란 몸을 청량한 하늘이 베어 버린다 무심코 손끝 베듯 아득하게 두 동강이 진다 구월의 바람 쏟아져 들어 온다 아이스크림 차 곁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푸르게 심장을 베인다 그늘에 핀 흰 수국 바람에 서로 어긋나듯 기우뚱 9월의 바람이 불면 내가 아니어도 네가 아니어도 된다 단칼에 베어져 일년초 지듯 살결로 감싼 푸른 핏줄과 붉은 심장 무거운 내장을 오늘은 버려도 된다 하늘만 가득히 들어와라 푸르게 푸르게 섬광처럼 베어져서 멀어지자 바다에 떠있는 흰 유람선처럼 오늘은 있어라 © 김종란 2011.09.19

누덕누덕 기운 돌 / 김종란

누덕누덕 기운 돌 김종란 누덕누덕 기운 마음 천진하게 웃다 옷 매무새 황급히 여미다 돌같이 매끄럽게 바라보다 멈춰 있다 돌 안에 머물다 묵묵히 돌 길 가다 옷깃을 스친 거지의 뒷모습 거지 되기 원했던 커다랗고 묵직한 돌덩이다 점점 굳어지다 움푹 파 들어가는 웅덩이다 잡음이 심한 뉴스다 오늘의 무게를 감당하다 무거워지다 가라앉다 *이우환의 돌을 바라보다 유한의 무게를 안고 무한 안에 자유로이 놓이다 *이우환의 Marking Infinity © 김종란 2011.08.22

분청사기 / 김종란

분청사기 김종란 깨뜨려져 흩어지는 소리 소리 소리는 떠나고 먼 옛날 꽃잎 지듯 깜깜하게 물레는 돌고 일필휘지의 손짓, 모란 연옥의 불꽃 머금어 아련히 희다 아니 불에 타 검다 새는 오롯이 오리무중을 걷지 담담하게 휘어짐을 새겨보는 덩굴 그리고 눈 크게 뜬 말 없는 물고기 안개가 머무는 하늘 눈 내리는 하늘은 몸으로 두르고 소리 없는 기척으로 마주 보지 않는 눈빛으로 다시 빚어지는 불의 추상, 미래 © 김종란 2011.07.26

몸 / 김종란

몸 김종란 100개중 99개쯤 통점을 찾아 찌른다 아프다 아 그래서 산 거야 산 것은 아프면 요동을 친다 장구처럼 탱탱하게 부어 올랐던 언니의 배도 격렬하게 쥐어짜며 산 것의 시위를 벌인 건가 죽음은 먼 산 그늘에서 묵묵히 소요하고있다 아프지 않으려 치료 받으며 아파한다 한계를 넘나들며 살아있어 아름다운 것과 그 헛됨과 고통을 받아 드리며 지친 몸을 일으켜 기름칠을 한다 신을 경외하며 신이 지으신 아파서 펄펄 살아있는 몸을 관리한다 아비와 어미가 걱정하고 염려했던 것처럼 몸을 측은히 여기며 살아있음에 연민을 품는다 눈물 어린 눈으로 소나기 지나간 들판을 우짖으며 날아가는 새를 사랑한다 © 김종란 2011.07.05

피카소와 Guitar / 김종란

피카소와 Guitar* 김종란 Guitar를 오브제로 몰두한 당신에게 고마워 아프게 반짝이던 시간들 해체된 Guitar 그 한 켠 납작 드러누우니 드러나는 무한 미로가 색감과 조형과 그림자까지 외포되는 Guitar의 실체 그 뜨겁고 맑은 춤 여섯 줄의 마법 같은 고요 숨 죽이며 바람에 흩어지는 색채 스미고 흐르다 문양으로 머문 소리가 유랑하듯 살아있어 안으로 안으로 감싸 안았던 불꽃의 기호가 벽지와 오래된 악보와 신문 목탄, 일상의 유희로 당신의 절대적인 구도안에 꼴라쥬 되 있어 빨간 실뭉치 버거웠던 내 스무 살의 열기 당신의 작업실에 기웃거렸을까 Guitar와 나의 눈 먼 사랑은 연주 되고 있어 * Picasso: Guitars (1912-1914) © 김종란 2011.05.24

흰 종이 문 / 김종란

흰 종이 문 김종란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와서 그리는 풍경화 그 뒷면의 문 하나의 지문으로 문은 만들어져 하나의 지도를 따라 나가 돌아와서 다시 확인하는 흰 종이 문 어둠이 빛을 바라보다 물든다 신의 손을 잡고 부활절 달걀을 물 들이며 물이 든다 이무로이 먹성이 강한 물소를 몰며 나락으로 떨어지길 즐기는 짐승 낡은 셔츠처럼 부욱 찢어져 눈 앞을 가로막다 하얗게 빛나는 뼈무덤은 어느새 초록으로 빛나는 숲을 바라본다 계절의 뒤편 문을 밀면 신이 자비로이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 김종란 2011.05.02

상상의 기와집 / 김종란

상상의 기와집 김종란 어머니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짓고 허무셨던 상상의 기와집엔 봄볕이 화사했는지 반지르한 흰털안에 검은 눈 숨어 반짝이던 매리 기뻐 소리치듯 목청껏 짖으며 왁자지껄한 사람 소리에 꼬리를 힘껏 흔들었는지 추운 바람 맞고 있던 먼 피붙이들 따스한 안방 보료 밑에 두 손 집어 넣으며 살아온 지혜로 그려 주시는 청사진에 이젠 마음이 놓여 삭풍 이길 어깨를 다시 펴 보았는지 바람보다 잽싸게 묵은 된장 독을 여시고 마련하신 세월 곰삭은 따뜻한 점심, 넌지시 전해주시는 마음에 아린 눈을 껌벅였겠지 허리를 펴시며 흰구름 한가로이 머무는 목단 꽃밭 옆에서 꽃자주빛 향기로운 생각에 빠지셨는지 빈방에서 꼼짝할 수 없이 누우셔서 해그림자 따라 고개 돌리시다가 짓고 허물고 다시 짓던 그 기와집엔 팔삭둥이 같은..

꽃으로의 기행, 금문교 / 김종란

꽃으로의 기행, 금문교 김종란 누군가가 수 없는 누군가가 삶과 죽음을 던지면서 금문교 여기 사람 하나 오롯이 서 있듯 금빛 길 발끝에서 머리까지 들어온 금문교를 종단하다 아득하다 이제 머리에서 발끝으로 난 금문교를 걷다 안개가 수시로 감싸는 Golden Bridge 샌프란시스코는 검은 벚꽃나무 둥치 캄캄하고 암울하게 버티다가 꽃안개 인다 세어 볼수 없는 꽃 함박웃음 눈물 범벅이 된다 몇 권의 책과 그림과 음악을 묻는다 드러나며 감추는 삶의 안개 속 꽃으로의 기행 맑고 투명한 자멸의 열기 안개가 인다 송이 송이로 무수히 녹슬어 암담해 감당할 수 없어 꽃이 핀다 송이는 기울어진다 안개가 바람에 밀리듯 서늘한 입맞춤을 주고 받는다 © 김종란 2011.04.11

길 없는 사람 / 김종란

길 없는 사람 김종란 집이 있어 모래 언덕이 나있다 나무 문 바다 향해 반쯤 열려 밀어보는 파도소리가 바다하늘 뇌수 가득히 들어와 갈매기 소리로 운다 상한 날개는 무겁다 햇빛에 부른 배에 빵 부스러기 넣으려다가 헛 구역질 한다 식빵 같은 길 한 방울 눈물은 눈가에 두고 문을 닫고 가버리는 사람들로 눈가에 자잘한 길들이 다져진다 하늘에서 떨어진 생선처럼 퍼덕여 본다 가슴 안에 바다가 넘쳐 한없이 고이나 구름 한 조각 사랑 한 조각 삭힐 수 없어 서서히 부패한다 문이 덜컹인다 살아온 찌꺼기로 불 붙는 집 바다 한가운데 서늘하게 있다 © 김종란 2011.03.31

가장 무거운 것 / 김종란

가장 무거운 것 김종란 지하 이층 숨긴 둥지에서 깨어난 새끼 비둘기들 천진난만한 울음소리는 아침잠 묻은 채 오르내리던 지하 삼층 에스컬레이터 잠시 멈춘다 빛과 속도를 비행하며 내려와 지친 비둘기 한 마리 지하에 두고 간 노래소리 물밀듯 승객 빠져나간 지하철 통로에 남아 빨간 잠바에 흰 모자 깔끔하게 쓴 중국여인 광활한 우주에 무중력으로 뜬 채로 아직도 쉬지 않고 혼자 대화하고 있다 운행을 멈춘 별똥별처럼 명멸한다 잉크냄새 풍기며 하루는 발행되었으니 생명의 뒷문 열어 젖혀 맞바람 치는 한 켠 그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낡은 이야기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일어나 빠르게 걷는다 무거워진다 폐기되는 길 위에 지어지는 집 숭숭 뚫린 꿈과 기억을 눈물로 메운 집 가볍고 아슬아슬한 집들의 골목을 되짚어 가는 길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