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 126

내 사랑 게르니카 / 김종란

내 사랑 게르니카 김종란 흰 눈 내리는 날 옥외 온천에서 뜨거움과 차가운 것을 받아들이며 거울안에 들어있는 다정한 사람들과 흰 눈처럼 내 살결에 닿아 스러지는 말 품고 흰 눈처럼 내려 쌓이는 거침없이 정다운 발소리와 목소리들 맑은 거울 속에서 목욕탕으로 꺾어지는 동네 골목길처럼 비스듬히 걸어 나와 선뜻한 바람에 목덜미 움츠리며 그 푸르른 게르니카 속을 한껏 움츠리며 통과한다 물에 퉁퉁 불린 붉은 발로 목욕탕 수증기에 휩싸인 젖은 머리로 나는 나름 푸르다 © 김종란 2012.10.12

괜찮다 / 김종란

괜찮다 김종란 마음 문 두드리시며 괜찮으냐 물으십니다 자만으로 가득 차 절벽 끝에 머물다가 떨어지는 나에게 핏빛 노을 되어 물으십니다 자기 연민의 족쇄에 채워져 어두움속에 숨어 있을 때 다 놓아라 너의 그 수치심과 자괴감 모두 다 내려 놓아라 너를 바라보는 너 그 비판과 회의의 충혈된 눈 그 어두운 거울을 깨뜨려라 나만 바라 보아라 활을 힘껏 당겨 그 과녁을 바라보듯 내 정 중앙으로 힘껏 겨누어 화살같이 날아 오너라 그렇게 내 가슴 한 복판에 명중 하여라 괜찮다 이제 너는 너의 자리에 있으니 © 김종란 2012.09.05

푸른빛 나는 분홍 / 김종란

푸른빛 나는 분홍 김종란 유리병에 기대어 흰 장미가 만개했어요 바라보니 흰 장미 곁 푸른빛 나는 분홍 어른거려요 큰 언니 더 이상 많이 웃고 얘기 안 해도 돼요 코너에서 사람 바라보기 좋아서 사람 참 좋은 것이라 날려 다니다 잠시 멈춰진 구겨진 종이쪽 빗물이 조금 담긴 빈 소주병처럼 반쯤 그늘진 벽에 아무도 모르게 앉아 세월의 바람소리에 추임새를 넣고 있었죠 언니가 수 놓은 시간 아무도 모르게 흐르죠 절벽을 지나 푸른 강물을 지나 바다에 들었네요 파도 한 자락으로 솟구치며 망망대해, 언니 © 김종란 2012.06.11

기차 객실 / 김종란

기차 객실 김종란 창 밖에 해 뉘엿뉘엿 지고 전등 빛 안 그림자 자란다 네가 읽는 책만 환하다 너의 턱 선과 손과 종아리만 환하다 잠시 기차 객실에서 네 마음 물방울 지며 빛난다 빛이 더 많이 떨어져 쌓이는 등받이 번잡함은 네 풍경에 들어가 스러진다 적요하다 기차는 노을을 품고 달린다 네가 책을 읽는 그림 기차 창 밖은 내가 사는 노을이다 너에게 편승한다 그림으로 남은 너에게 다가가 비춰 본다 뒤섞여 진 무리수와 유리수 기차를 그린 그는 넘치는 부분 치밀한 부분 담담하게 큰 붓으로 마무리 한다 © 김종란 2012.05.14

복사꽃 나무 그늘을 거닐며 / 김종란

복사꽃 나무 그늘을 거닐며 김종란 깨알 같은 소식에 귀 기울인다 누대에 걸친 서까래 대들보만큼 무거워 휘청이는 쉼표, 마침표. 몰래 후두득 봄비 소리에 묻히는 그늘을 구기고 구겨서 꽃으로 살아낸 것의 목소리 웃음소리 땅의 온기와 더불어 살아있던 것의 온기 무수히 지나가는 생명의 발자국 소리 죽이며 채 말이 되지 못한 두근거림으로 복사꽃에 가까이 다가간다 사랑에 다가가듯 거짓말처럼 연분홍 빛 그늘 © 김종란 2012.04.08

침향(沈香) / 김종란

침향(沈香) 김종란 어두워진 후의 시간 눈을 감고 향을 찾는다 어두움 속으로 떠날 배낭을 꾸린다 익숙한 향 기도서 사진첩을 뒤적인다 향로(香路)를 찾는다 오래된 마음이 울지 않게 꽃처럼 부드럽게 자라고 있는 생각나무 숲을 낮게 비행하며 여리게 반짝이는 가장 오래된 눈물을 바라본다 침향(沈香) 잃었던 길 숨을 멈춘다 날개를 퍼덕이면서 일탈한다 물기 머금은 뜻 잠시 내려놓아 심해어처럼 다가 가 순이 움트던 어둠도 향기로운 새로운 소식으로 묻는다 © 김종란 2012.02.05

너의 끝 노래 / 김종란

너의 끝 노래 김종란 소나무 숲 끝머리 노을은 붉다 사람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에 잠시 노을만 붉다 시간의 늪에 머무는 우리는 억새풀로 자라지 희게 서로 희게 가슴에 기대다 검게 서로 검게 가슴 두드리다 노을에 허리 잘리고 붉은 늪 무릎을 꿇었지 붉은 늪 서로를 베는 소리 서걱이지 무성하게 엉켜 자라는 우리의 모진 꿈 날선 꿈 낯설게 헤쳐 다니는 너의 벌거벗은 발 어느 노을 지는 숲, 너를 보듬어 네가 부른 노래, 이 먼 곳에서 이제야 듣는 소년의 노래 소나무 숲 끝머리에 타는 노을 너의 끝 노래 주황색 빛에 둘러 쌓인 이젠 숲의 노래 어두움을 예감하며 감싸 안는 神의 노래 © 김종란 2011.10.24

떠나는 소리 / 김종란

떠나는 소리 김종란 당신 거기 있었나요 부르는 소리 높은 산정 절벽 위 널따란 바위에 누워 하늘에 들어 하늘빛에 얼굴이 잠겨 당신이 떠난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누구나 떠나고 나도 떠나온 걸요 떠난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 생선 비늘처럼 번쩍이기도 하는 몸을 지니고 태어나서 떠난답니다 마음 다잡고 간답니다 아마 다시 볼 수 없는 아마 죽을 때까지 볼 수 없겠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는 소리 그 씁쓸함에 혹 씁쓸함을 더하지 않았나 하는 빈터에 울릴 떠나는 소리 © 김종란 2011.10.14

바다시계 / 김종란

바다시계 김종란 초침을 감춘 바다 느긋하다 창문도 없고 현관문도 없다 하늘은 깊음으로 생명은 비릿함으로 안으며 표정은 더욱 부드러워진다 빛을 은닉한 *Renoir 의 'Spring Bouquet' 상처의 붉은 줄이 불현듯 빛나는 우리 우리 기다리다 빛을 은닉한 Renoir 의 'Spring Bouquet' 당신은 품에 안는다 낮아지며 깊이 깊이 스며든다 우연하게 여기 평안하게 바다를 숨쉰다 꼬리만 보이는 돌고래 바다 테이블 위에는 커피 한잔 해초처럼 흔들리며 이리 저리 몸이 기울어지며 바다를 마신다 용서에 익숙한 당신 바다를 등지다 바다에 안기다가 당신 안에서 바다를 밀고 간다 *Renoir (French 1841~1919) © 김종란 2011.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