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 126

연금술사 / 김종란

연금술사 김종란 ICU 유리창에 늦은 오후의 햇볕 켜켜이 쌓이다가 스르르 연한 갈색으로 사라진다 산소 마스크를 쓰고 연금술사는 숨 가쁘게 내쉬고 있다 낡아 부서질 듯 서로 기대어 있는 아랫니가 이제 성벽은 곧 허물어지려 한다 들꿩 같은 풋풋한 가슴 슬며시 들여다 보던 검은 보석 한 쌍 그 고집스레 불붙던 두 눈 감겨 있다 女人을 향하여 미소 지으며 찬란한 빛으로 휘감던 변화무쌍한 저음의 목소리 들리지 않는다 이탈리안 담당의사를 거느리고 간호사 두 명 거느리고 느리게 암전으로 다가서는 유효기간 백 년의 라벨 이제 흐릿하게 지워진 채 매달려 있다 지금 이곳에 잠시 몸은 부려져 있다 백 년을 향해 무겁게 무겁게 떼어 놓는 발자국소리 연한 녹색으로 가라앉는 공기로 바다위로 떠오르다가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다가 그..

달 항아리 / 김종란

달 항아리 김종란 끝을 살짝 잡은 것 같은데 벌써 저녁 무렵 가볍게 한 잔을 마셨는데 꽃나무는 옹이가 지고 빗물 눈물 무늬가 어룽진다 스치듯 소매 끝자락 잡은 것 같은데 발은 닳아서 이미 경계에 가 닿아 있다 마루 끝에 잠시 앉았다가 목례를 하고 떠나든지 흰 도자기 그릇에 마음을 담고 잘 익은 술처럼 바라보며 약간 흔들어 보기도 하며 쓴 약처럼 두 눈을 감고 꿀꺽 삼키기도 하며 취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대 내가 아님을 © 김종란 2010.05.07

슬픈 포스터(가족) / 김종란

슬픈 포스터(가족) 김종란 슬픈 가족은(포스터) 없었다 스토리를 잃어버린 채 애드리브도 없고 상영되는 동안 관객도 없었다 슬픈 가족은 포스터가 이제 있다 잘 찢겨지지 않는 낡은 포스터를 지루하고 잔인한 스토리를 선택 해버렸다 애드리브는 용납할 수 없었다 관객을 쫓으며 상영되고 있다 포스터는 묻는다 (슬픈)가족이 될래요? (슬픈)포스터안으로 들어간다 영화는 상영 되야 한다 피곤하고 뻑뻑한 눈을 부릅뜨시라 포스터를 위해 슬픔을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뉴욕 이곳 저곳을 부에노스아이레스 이곳 저곳 기웃거린다 유서 깊어라 이 영화는 상영되고 재상영된다 자막에 찍혀 떠오르는 그대 가족들의 이름들 비스듬히 비켜선 진달래꽃들 검은 화면에 잠시 어른거린다 필름 낡아도 거부할 수 없는 상영 원칙에 의해 영화는 상영되고 ..

*길상사 / 김종란

*길상사 김종란 낮에 꾸는 꿈이려니 하소 햇볕 동그라니 머무는 곳에 잠시 잠들었소 머리 속엔 음악이 그치지 않아 가슴만은 비워두려 하오 매서운 발걸음소리 뒤로 뒤로 잦아들며 손으로 짓는 모든 것이 아프기만 해서 황금으로 변해서 살아서 찡그리는 풀 한 포기를 부러워하오 소유하지 않아서 소유하는 받지 않아서 받는 그럼에도 소유하지 않는 법문이 머무는 자리 사랑이 지나간 자리 지나가는 자리 그대들의 소요하는 발걸음이 내 가슴 위를 지나가는군요 낮에 꾸는 꿈이려니 하소 햇볕 동그마니 머무는 곳에 *길상화가 법정스님께 시주한 절 © 김종란 2010.03.16

겨울사람 / 김종란

겨울사람 김종란 겨울사람은 언저리에 닿고 싶다 담배를 태우면서 화면 가득 노래 부르는 샹송가수 그 부드러운 미소 거침없는 커다란 눈과 입 살아있으므로 닿을 수 있다 이제 겨울 한 가운데서 수프를 끓이면서 보내는 시간 겨울 밤 불빛들은 가슴 언저리 꽃처럼 머물다 간다 추운 것을 함께 견디려 하다가 짐짓 더 추운 것을 서로 덤으로 얹어 주면서 겨울사람 하나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샹송가수는 걸어나와 수프를 끓인다 겨울사람 영화속에서 커피잔 언저리 살짝 두드리며 입술에 와 닿았던 향기의 소소한 부분을 불러낸다 칼로 말을 자르는 추운 부엌에서 샹송가수는 부드럽게 노래를 불러준다 남겨진 겨울사람에게 © 김종란 2009.12.30

플라스틱 나무 밑에 둔 심장 / 김종란

플라스틱 나무 밑에 둔 심장 김종란 *고도를 기다리며 슬픔을 선정한다 달콤한 슬픔 쌉쌀한 슬픔 아이스크림 두 손에 쥐고 대열을 빗겨 지나간다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온다 차오르는 시간 품어내고 품어내며 어김없이 뛰는 심장 플라스틱 나무 위로 해가 떠오른다 브람스를 선정한다 유연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탈색된 거리 내달린다 심장은 달콤한 아이스크림 스르르 녹아 내리며 플라스틱임을 잊는다 기다리며 온기 없음을 합성이라는 걸 잊는다 *사무엘 베게트의 희곡 © 김종란 2009.11.30

이 기차엔 비상약이 없다 / 김종란

이 기차엔 비상약이 없다 김종란 오후와 저녁 밤을 가로지르며 목쉰 소리를 내지르는 이 기차엔 승객이 없다 매캐한 연기 통로에 항상 낮게 머물러 메마른 눈 기차는 너무 빠르거나 느린지 아무도 볼 수 없다 어둠을 뚫고 가면서 형제를 만나는 생각을 했다 장방형 식탁에 팔꿈치 고이고 뜻 없는 이야기 주고 받는 겨울나무 밑 수북이 떨어진 마른 열매 하나 낙엽 기대어 뒹구는 시간을 이 기차는 형제를 만날 역전에 서지 않는다 너무 빠르거나 느려서 나는 그들을 볼 수도 없다 함께 자라난 초원 함께 손잡은 형상에 골몰하며 아주 오랜 시간 뒤 그 역을 다시 지나간다 낡고 다정한 역사(驛舍) 오후의 햇살을 받는 화단엔 그려 넣은 그들이 서있다 뒷모습 혹은 옆모습으로 자꾸 덧칠해서 알 수 없어진 감정의 선을 면도날로 긁어 내..

프린트 / 김종란

프린트 김종란 길 조용하다 흑백의 나무들과 잡목 숲 사이로 길은 완만하게 구부러져 있다 흰 길이다 나무들은 두텁고 부드러운 질감이다 고개를 갸웃하며 낯익은 그 길을 들여다본다 온밤 지나 새벽녘 지나 아침으로 찍혀 나오는 회색 안개 묻힌 얼굴들 어깨를 부딪힐 때도 모호하게 일별하며 잘라지는 따뜻한 흰 모래일까 바짝 다가선 길 인쇄되면서 길은 희게 반짝인다 © 김종란 2009.11.17

포장의 기술 / 김종란

포장의 기술 김종란 두 입술의 포장, 잠시 멈추시면 형광 빛으로 포장해드립니다 두 눈의 포장은 날고기 빛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잠시 감으세요 비린내 나는 곳에서 살게 해드리겠습니다 머무르세요 태엽을 감아드리겠습니다 비릿한 것이 좋아 단숨에 포장되는 기분 어떠십니까 그는 불을 맞았습니다 불이 활활 타고 있습니다 불 타오르는 그는 바비돌 케이스에 들어갔습니다 투명하게 바라봅니다 포장되었습니다 명세서와 인증이 붙여집니다 봉인 되어서 납품일을 기다립니다 (재고창고가 붐빈다는 소문) © 김종란 2009.11.13

고양이가 사는 집 / 김종란

고양이가 사는 집 김종란 누군가 떠나는 것에 대해 말해주었으면 떠나보라고 말해주었으면 고양이는 집에 들어와 때론 기지개 펴며 창틀에 앉아 노곤한 해바라기 불현듯 어른대다 사라지는 뜬 소식에 졸음이 쏟아져 안경이 코밑에 걸린 안주인을 지켜보며 우아한 꼬리를 부드럽게 펼 수 있는 작은 공간 깃털에 젖은 밤이슬 털어내며 나뭇잎 사이를 날아올라 사고뭉치 이 장난감 새들 내가 바라볼 때 제발 최면에 걸리시라 안하무인 내 거드름에 푹 빠지시라 내가 떠났더라도 잊지 않기를! © 김종란 2009.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