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 126

흰 눈 벚나무 / 김종란

흰 눈 벚나무 김종란 벚꽃 어리는 눈 핏발이 서린 겨울이네 흰 눈 벚나무 수정 빛 여행가방 손잡이 알맞게 누그러졌으니 가볍든지 무겁든지 무릎 꿇고 양말을 개며 바지 탁탁 털어 접으며 오늘의 수업 마치고 목숨의 한 부분 말끔히 지운다 살아있어, 그 신비로움으로 뭉싯거리는 몸짓으로 문을 열고 낮고 짙은 회색 구름속에서 이무로이 찰라의 것들 낌새를 훔쳐내지 눈을 찌그려라도 뜨고 응시하면 물꼬가 터져 흰 눈 벚꽃이 진다 검붉은 열매가 드러난다 살아있어 봄 겨울에 흰 눈 벚나무 © 김종란 2011.02.06

성냥개비 집 / 김종란

성냥개비 집 김종란 내 손안에 드는 집 눈이 내린다 몇 송이 눈에 휘청인다 새끼 손가락으로 대들보를 받쳐준다 무너지더라도 눈이 펑펑 내렸으면 협궤열차가 달려와 눈의 마을에서 조그많고 반질반질한 탁자위로 달려와 미끄러질 듯 덜컹거리며 멈춘다 기다림의 집 모든 작은 것은 서로를 떠받치며 균형을 잃어 밀리며 뒤로 벌러덩 자빠져도 소리가 없다 눈이 속마음에서부터 펑펑 쏟아져 눈사태를 이루면 창문의 얼룩을 손끝으로 살짝 밀어 본다 폭설의 집 무너져 내리며 부딪히며 잠시 나르기도 하는 집 가벼웁고 쉬이 사라지는 눈이 내리면 폭설이 내리면 불의 기호들이 모여 춤추는 집 눈 속에 파묻혀도 뜨거운 집 © 김종란 2010.12.24

하루 / 김종란

하루 김종란 반딧불 일렁이듯 오월 보리물결 뒤채듯이 한치의 공간에 슬며시 들어선 좀도둑 이무로이 미소 짓다, 기웃대다 어여쁜 것 훔쳐 내빼지 오늘 그리고 미래의 몸으로 세상을 지은 말(言) 품은 화살로 한치의 여지에 그대 안 부르르 떨며 명중하는 흙의 꿈 쓸모를 버릴 수 없어 과녁은 지는 석양을 나르는 화살의 꿈을 꾸네 하루 하루 낯익은 도둑을 배웅하며 들숨과 날숨 사이에 새겨보는 말 세상을 짓는 말 © 김종란 2010.12.14

소포 보내기 / 김종란

소포 보내기 -- 우주 우체국에서 김종란 네가 내 눈 앞에 없다는 것 우주 어느 곳에 있다는 것이지 우주 어느 곳 명상도 하고 깨끗하게 방도 청소 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단지 내 눈에는 네가 보이지 않아 빛으로 반짝이며 깜깜한 곳에서도 살아 있겠지만 네가 보이지 않아 전화도 이메일도 가 닿겠지만 손으로 만질 수 없다는 것 우주 어느 곳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지 열중하여 보이지 않고 오랜 동안 볼 수 없는 네 어깨를 치며 깔깔거리며 웃을 수 없는 것이지 우주 한 귀퉁이를 떠메고 잠잠이 너는 가고 있지 우주로 소포를 보내 배달 되기를 네가 나를 열심히 찾았을 때처럼 우주 속으로 조그만 소포를 보내 나를 보낼 수 없어 하늘을 배회하는 잠자리와 처음 핀 코스모스를 © 김종란 2010.09.06

종려나무 숲으로 / 김종란

종려나무 숲은 흰 길이 끝나는 곳에 우거져 있다 눈을 감으면 그곳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어제도 이 만큼에서 끝이 났지만 그 길을 간다 예상치 못하게 눈에 상처를 입었다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종려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항상 있다 깊은 소리를 잣는 그늘 안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종려나무 숲 상처를 열고 그 안의 길을 간다 이 나무를 그려내려 했고 바라고 싶었고 없으면 지어내려 했다 상처 속 열린 길로 종려나무 안으로 한 손은 이미 떠난 소리를 잡은 듯 가장 느린 춤으로 © 김종란 2010.08.26

시가 사는 집 / 김종란

시가 사는 집 김종란 우회 하며 그 짧은 길을 모르는 집처럼 페니와 쿼터를 세면서 백불짜리 종이를 세면서 오늘은 그만 지나친다 백일홍 한송이 손에 쥐고 바라보며 튼 입술 복분자술로 적신다 얕은 개울물 가파르게 흐르며 마음은 그곳을 넘본다 나의 생각하는 열쇠가 있는데 그것은 아니다 문이 덜커덩 열린 데도 아니다 만나기 원하는 것을 만난다면 그것은 네가 아니다 마음이 가 닿지도 발길이 가 닿지도 아이러니도 가 닿지 않아 멱살 잡고 뒤 흔들고 싶어하는 두 손 감추고 오늘은 너에게 가야 한다고 그 짧은 길을 우회한다 © 김종란 2010.07.06

섬세하고 유장한 말씀 / 김종란

섬세하고 유장한 말씀 김종란 아버지 낮은 목소리 들리네 가까웁게 웃음소리 밝은 그곳 아니고 이렇게 홀로 남아 있는 어둑한 곳에 더 가까웁게 따스한 어투로 부르며 아주 여린 마음에게 하듯 바라만 보는 총총한 눈빛을 향하니 이 세상의 초침은 잠시 잦아들지 긴 눈빛으로 쫓으시던 젊음은 이제 지나서 내 아버지 마음 문 뒤늦게 밀어보면 장도를 걷는 무사처럼 섬세하고 유장한 말씀 닫아 걸고 불면의 밤을 이기시던 이야기꾼의 가슴에 기대면 큰 바람소리 피에 섞인 것이 아닌 영혼에 깃들어 있을 소식을 애써 들어 보시려는 녹슨 갈비뼈를 벌려 바짝 마른 심장이 깃들도록 눈 바람 가두는 오두막 묵언(默言)의 오두막에서 깃을 털며 눈물에 젖은 깃을 털면서 새로운 말(言)은 깃을 펴보다 그림자를 펄럭이며 세계의 초침 위로 날아간..

티테이블에는 어제의 햇빛이 아직 남아있다 / 김종란

티테이블에는 어제의 햇빛이 아직 남아있다 김종란 티테이블에는 어제의 햇빛이 아직 남아있다 아무도 오지 않아도 약간 빼어 놓은 의자엔 온기가 서려있다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어서 모서리들이 둥글게 부드러워 보인다 분명 꽃은 없는데 꽃들이 꽃병 안에서 미소 짓는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어제의 그제의 그그제의 햇살이 쌓인다 누가 그곳에 가지 않아도 티테이블은 만나고 있다 사람 산토끼 거북이 종달새 모습들이 불현듯 테이블 언저리를 잡고 웃고있다 티테이블은 몽상의 바다에 자리 잡고있다 내가 온곳에서 몰래 따라온 푸름이 깊어질 수록 더 반듯하게 몸을 펴고 앉아있다 눈을 감으면 티스푼이 찻잔에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시간의 껍질이 벗겨지는 작은 마주침들 족쇄가 차인 발목은 점점 깊은 바다에 가라앉고 열 발걸음쯤 떨어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