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란 125

이슬 맺힌 말(言) / 김종란

이슬 맺힌 말(言) 김종란 종이 집에 기대어 나팔꽃 무리 진다 이슬 맺힌 말 햇빛 속에 숨어있다 경이로운 고대의 문양/ 여리고 한없이 부드러운 입술을 연다 종이 집에 누워 시간을 거슬러 비치는 비밀 문서 파랗게 질린 눈썹으로 보라색 봉인을 응시한다 경건하게 나팔꽃 무리 진다 아파도 괜찮으니 약장 문을 닫는다 종이 집 물기 머금은 소식(消息) 머문다 © 김종란 2013.07.03

잃어버린 모자 / 김종란

잃어버린 모자 김종란 시계 태엽 뒤로 감은 듯 옛날의 시간 유난히 목청 좋은 휘파람새 휘파람 소리 찔레꽃 희디흰 꽃망울들 피어 있다 잃어버린 모자 시간의 저쪽에 놓여있는 모자를 집는다 짙은 그늘의 안쪽 희게 피어 있는 옛 이야기들 그 환한 빛 숨은 어둠 사이에서 손을 내민다 무릎 꿇고 이야기를 안는다 분침과 초침 사이에서 들리는 휘파람 소리 눈 맞추며 들여다 보는 상흔 사람이 피우는 꽃 내가 그렸던 너의 모습 그 곳에 피어 있다 사람 사는 이야기 만개한 짙은 숲속에서 조용한 귀 엷은 미소 가리던 모자를 집는다 © 김종란 2013.05.08

산수화 1 / 김종란

산수화 1 김종란 *남농의 산수화에서 뵈었던 분이신데 어느새 훌훌 그 물기도 털어 버리시고 삿갓 하나 벗어 두시고 가셨다 하네 흰 국화에 들어 앉아 그 곳이 궁금하네 도착한 기념으로 소주 한잔 털어 넣으셨을까 예(藝)의 등짐은 누가 받으셨을까 두텁고 따뜻한 두 손은 누가 잡으셨을까 닳고 헤어진 두발은 하늘을 밟으며 돌아 보셨을까 이제 초록은 깊고 하늘은 흰 구름으로 덮이네 *남농(南農) 허건(許楗) © 김종란 2013.04.30

꽃이 왔다 가듯 / 김종란

꽃이 왔다 가듯 김종란 끝자리 벚꽃 바람에 자유하듯 소리 마음껏 지르다 침묵하다 웅얼거리다가 꽃이 가는 소리 따라 검은 소 한 손에 잡고 신(神)과 더불어 간다 하늘 물든 손으로 감싸 쥐는 따뜻한 욕지거리에 차가운 기도(祈禱) 한점 날렵히/ 우짖는 짐승에 얹힌 잠잠한 신(神)의 눈길 맛있는 스시 깨끗한 접시에서 군더더기 없이 바라 본다/ 꽃 지는 소리 허기지며 자유하리니 멍에 벗는 소리/ 네가 왔다 가듯 © 김종란 2013.4.22

음악실 / 김종란

음악실 김종란 스테인드글라스 하늘에 낡고 닳으며 내려가는 계단에 한적한 구석에 시선을 내리다 웅성거리는 두개골 하늘 빛 비스듬히 지나는 나무의자에 꺼내 놓는다 음악에 방치한다 장엄하게 여리게 느리게 행진하듯 외과의사는 음악은 거침없다 기쁘게 뇌는 노출 되었다 뇌의 지도 위로 음악은 범람하다 일상의 문 넘는다 하루 하루 눈 먼 쥐는 뛴다 이리 저리 뛰다가 부딪혀 뒹구는 실험실 벽 음악이 온다 신의 손으로 자비롭게 노출된 두개골 쓰다듬는다 푸른 물 배인 흰 붕대 두른 채 눈 먼 실험실 쥐는 쉬이 부딪힌다 봄 스테인드글라스 하늘에 음악이 부딪힌다 © 김종란 2013.04.03

빨간 사과 / 김종란

빨간 사과 -- 시리도록 아름다운 세상을 남기고 가신 소설가 김지원님께 김종란 녹음 우거진 공원으로 검고 긴 머리 휘 날리며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녀의 눈은 풍성한 머리 바로 밑에서 꿈꾸고 문자는 두 손에 가슴에 춤추는데 스무 살의 그녀는 갔다 시린 손으로 따뜻한 가슴을 안으며 바람 부는 곳으로 있지 않은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남겨 놓았다 그녀는 언제나 스무 살이다 백 년의 베개머리에서 미리 온 가을 햇살처럼 환하다 백발이 무성 하여도 그 가을 햇살에 찍힌 세상은 한 입 베어 무는 빨간 사과 시어서 눈물 맺히며 웃음 환하다 © 김종란 2013.02.05

바람의 기타(Guitar) / 김종란

바람의 기타(Guitar) 김종란 케이블카 위에 구름이 흐른다 케이블카 지붕 위에 기타를 안고 있다 바람은 기타를 울려 본다 내 서툰 연주 덮으려 연주를 한다 바람이 밀어다 올려 놓은 케이블카 지붕 위에 위태위태 흔들리며 선다 기타를 껴 앉는다 오후 4시와 5시 사이 허드슨 강이 무겁게 흐르고 엿가락 같이 끈적하고 기인 길도 터벅터벅 들어 온다 비 개인 숲속에서 자라나 뛰어든 폭포 이미 끝자락 푸르고 희게 웃으며 떨어진다 붐비는 도시 어두운 길에 화투짝처럼 떨어져 있다가 바람에 휘몰려 지붕위에 날아 오른다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맨해튼 어느 지붕 위에서 서툴게 기타를 친다 젖은 신발 벗지 못한 채 지니고 온 때 묻은 배낭에 기대어 보다 못한 바람이 나의 기타를 울린다 여러 길을 걸어와 잠시 머물다 일어서야..

누(淚) 2012 / 김종란

누(淚) 2012 김종란 슬픔을 간직하겠다 찾아 왔으니 품어 안고 본다 푸른 눈꽃 어룽지는 눈 들여다 본다 나의 손은 얼음 슬픔 안에서만 자유로운 얼음이다 우리 서로 손 잡을 때 슬픔은 빙하기에 든다 멀리서부터 기적소리 새된 슬픔의 소리 이른다 슬픔의 기관차는 육중하고 오래 되어 거칠다 일단 정지 신호를 무시한다 얼은 입으로 당신이 웃을 때 얼음조각이 비수처럼 빛나며 부서진다 우리는 동지이나 적이다 내 슬픔의 용량은 너에 미치지 못하니 나는 너를 품으면서 배척한다 비밀처럼 뿌리 내리길 향기 없으나 향기 예비한 그 미세한 파문 기억하지 주르륵 흐르는 눈물 웅크린 채 얼어붙은 두 손을 본다 © 김종란 2012.12.05

노래하는 당신께 / 김종란

노래하는 당신께 김종란 눈이 내리길 마지막 폭죽처럼 불꽃 잡은 채 타들어가는 당신께 눈이 내려 그 뜨거운 얼굴 흰 눈사람에 들어 숨쉬길 세상의 악보를 읽으며 목젖을 보인 채 힘껏 노래 부르다가 부호처럼 변하는 악보에 맞추어 알 수 없는 춤 추었으니 흰 눈사람에 들어 잠시 아픈 발목 멈추길 검은 세상에도 흰 눈은 내리니 이제 불의 심지 한껏 낮추고 귀 기울이길 차갑지만 한없이 가벼우며 흔적 없을 다정에도 스며드는 눈에 들길 눈이 녹아 물자국 남기듯 잠시 세상을 물걸레질 하느라 숨 잦다고 당신의 노래도 춤도 © 김종란 2012.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