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ak of the devil and he is sure to come’이라는 영어속담이 있다. 이것을 ‘악마에 대하여 말하면 악마가 꼭 온다'는 식으로 직역한다면 당신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하는 순간 그 뜻이 귀에 금방 쏙 들어오지 않는가.
인간의 잠재의식에 깊이 박혀 있는 두려움의 대상이 동서양 간에 이렇게 좋은 대조를 이룬다. 옛날 양키들은 악마를 무서워했고 우리 선조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에서처럼 우리의 호랑이는 위기를 지칭한다. 반면에 ‘between the devil and the deep blue sea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서)’ 하면 진퇴유곡에 빠졌다는 뜻이다. 코끝이 뾰족한 서양의 악마는 파도 철썩이는 바닷가에 살고 있고 눈이 부리부리한 호랑이는 슬금슬금 산속에 숨어 산다.
카렌 카펜터즈(Karen Carpenters)가 70년도 초기에 부른 힛트곡 'I am caught between goodbye and I love you (나는 당신과 헤어지고 사랑하는 중간에 잡혀 있어요)'라는 노래 중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So constantly stranded, I can't understand it. / This double life you've handed me. / Is like the devil and the deep blue sea. (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 / 이렇듯 당신이 내게 준 이중인생은 /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같아요.)
언어발달사의 차원에서 보면 서구의 위기의식은 신과 악마의 투쟁에 뿌리를 두었고 우리는 식인동물(食人動物)에 대한 두려움에 있었다. 악마가 종교적인 개념이라면 호랑이는 아주 다급하고 직접적인 공포의 대상이다. 위험이 코앞에 닥쳤을 때야 뒤늦게 야단법석을 떤다는 뜻으로 ‘호랑이 보고 창구멍 막기’라는 우리 속담은 또 어떤가. 비슷한 개념으로 영어에는 ‘Needs must when the devil drives’라는 속담이 있는데 ‘다급해 지면 못할 짓이 없다’는 뜻.
‘devil’은 라틴어와 희랍어의 ‘diabolos'가 13세기 초엽에 변한 말로서 다른 사람을 욕하거나 헐뜯고 비방한다는 뜻이었다. 요컨대 악마라는 개념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험담이나 악담을 할 때 그 흉측한 울음을 터트리면서 양키들 마음에 탄생했던 것이다. 이 뜻을 아직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슬랭으로 ‘catch the devil'이 있는데 이것은 악마를 잡는다는 말이 아니라 심하게 욕을 얻어먹는다는 뜻이다.
서구의 악마는 남을 비난하는 사람, 즉 자기는 옳고 남이 틀린다고 굳게 믿는 사람을 대변한다. 이를테면 종교적인 이념의 차이 때문에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하여 전심전력하는 테러리스트들이 즉 악마라는 논리가 훌륭하게 성립되는 것이다. 그들은 시쳇말로 ‘호랑이가 물어갈 놈'들이 아닐 수 없다. 어흥~!!
옛날 옛적 고려 적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부터 양키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남을 욕하는 인간들이었다. 우리가 사람을 잡아먹는 ‘동물'을 무서워하는 동안 그들은 이데올로기(ideology)를 달리하는 ‘사람'을 무서워한다.
동방예의지국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당신은 어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야 너 그 사이에 어쩌면 이렇게 폭삭 늙었냐?” 하며 함부로 험담을 하는 우리의 의식구조는 어떠한가. 좀 가깝다는 이유로 허물없는 척 그렇게 서슴없이 상대의 감정에 상처를 입히는 우리 재래식 사고방식이 혹시 악마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 서 량 2007.05.13
-- 뉴욕중앙일보 2007년 5월 16일 서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469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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