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69. 나는 없다

서 량 2020. 8. 10. 08:51

 

병동에서 ‘caretaker’와 ‘caregiver’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caretaker’는 빈집, 빌딩을 지키는 경비원이라는 말이면서 ‘간병인, 양육자, 보살펴 주는 사람’을 뜻하는 ‘caregiver’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take’와 ‘give’는 서로 반대말인데 어찌 의미가 같을 수 있냐고 간호사가 질문한다.

 

문제는 ‘care’라는 말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뜻을 품는다는 데 있다. ➀돌봄, 보살핌 ➁조심, 주의 ➂걱정, 염려

 

이토록 ‘care’에는 의료인이 환자를 치료하거나 간병인이 환자를 돌볼 때나 부모가 아이의 성장을 보살필 때 걱정을 해야 한다는 불안한 메시지가 숨어있다. 환자의 걱정을 빼앗아(take) 해소시키고 환자에게 보살핌을 주는(give) 것은 둘 다 같은 말이라고 간호사에게 설명했다.

 

당신은 미국인 친구와 헤어질 때 “Take care! 몸 조심해, 살펴 가십시오” 한다. 그러나 말도 안되는 이유로 남의 감정을 박박 긁어 대야 직성이 풀리는 상대와 언쟁을 하다가 “Who cares!? 내가 알게 뭐야, 누가 뭐래!?” 하며 앙칼지게 외치기도 한다. 그 성가시고 짜증스러운 사람이 모종의 성격장애 환자라는 상상을 한 번 해보기를 바란다.

 

앤드루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 병동에 입원한 지독한 성격장애 환자다.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경계성 성격장애’가 자기의 진단명이라고 수시로 나를 상기시킨다. 수틀리면 자해를 해서 ‘caregiver’를 괴롭힌다. 자해의 원인은 무엇이 자기 뜻대로 안됐기 때문이다. 병동 벽의 나사 못을 떼어내서 팔뚝을 북북 긁어 놓고 의사가 저를 섭섭하게 해서 그랬다며 고래고래 소리친다. 약도 안 먹겠다 한다.

 

그는 성질 사나운 다른 환자와 간간 주먹다툼을 한 후에 자신의 행동을 ‘acting out’이라 스스로 지적한다. 좌절감이나 분노를 속으로 삭히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하는 심리 메커니즘, 행동화(行動化)라는 전문용어를 쓴다.

 

주먹다툼의 원인은 어김없이 남에게 있다. 사르트르의 명언 “Hell is other people, 지옥은 남들이다”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자신은 천사처럼 결백하다는 신념을 끝내 버리지 않는다. 자기가 얼마나 무고한가를 증명하기 위하여 사태의 자초지종을 얘기할 때 저 자신은 쏙 빼 놓고 말한다. 나중에 따로 날을 잡아 피해자의 아픔에 대한 후편을 기약하면서, 그의 스토리텔링에 자신은 부재 중이다. 그는 극적으로 시사한다. “나는 없다!”

 

앤드루는 부모에게 심하게 학대를 당하면서 자랐다. 과거에 파묻혀 사는 앤드루는 지금 완전 허깨비다. 나는 허깨비에게 말한다. “너는 네가 과거에서 끌고 온 지옥같은 ‘남들’에게 현재를 맡겨 두고 어디로 가고 없느냐?”

 

앤드루를 보살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다. 수련의 시절 한 지도교수 왈, 경계성 성격장애의 치료는 상담사의 생존이 우선이라 했다. 허깨비에게 기가 꺾이면 안된다. 근래에 나온 성격장애 치료 지침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 정신상담이 오랫동안 난국에 빠져 아무런 진척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차라리 사기그릇 가게의 황소(a bull in a china shop)가 되어 환자의 정신세계를 흔들어라.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앤드루를 향하여 그럴 용의가 있다. 위험을 감수할 요량이다. 그를 향하여 산지사방 사기 접시를 깨뜨리며 날뛰는 황소가 될 것이다. 물리적으로? 물론 아니지. 말로! 언변으로!

 

© 서 량 2020.08.09

--- 뉴욕 중앙일보 2020년8월 12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8556611

 

[잠망경] 나는 없다

병동에서 ‘caretaker’와 ‘caregiver’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caretaker’는 빈집, 빌딩을 지키는 경비원이라는 말이면서 ‘간병인, 양육자, 보살펴 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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