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열 살쯤이었을까. 어리고 서툰 솜씨로 펜화를 그려서 얇은 만화책을 만든 적이 있다. 소년 탐정이 주인공이었던 이야기 줄거리는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으면서 만화책 제목을 ‘정의는 이긴다’로 했던 기억만 고스란히 남아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목을 붙였을까. 당시 한국 사회가 불의(不義)가 만연하던 때라서 나도 어른들 말을 흉내 냈던 것인지도 모르지. 인간의 옳지 못한 행실에 대한 예민성이 타고난 핏속에 세차게 흘렀기 때문이었는지도. 둘 다? 아무튼 나는 그때 벌써,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서 남을 속이는 짓이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행동 따위는 불의라는 ‘판단’이 분명히 서 있었다.
‘judge, 판단하다’는 12세기 고대 불어와 라틴어의 ‘just’에서 유래한 개념이었다. ‘justice, 공정, 재판관’과 말의 뿌리가 같다. 우리를 긴장시키는 이 말에는 옳지 못한 짓을 정도가 지나치게 했을 경우에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는 불편한 뉘앙스가 깃들여져 있다. 그리고 당신은 차제에 판단(判斷)이라는 한자어의 ‘끊을 단(斷)’을 주목하기 바란다. 무엇을 끊겠다는 것인가. 생명? 밥줄? 자유? 이렇듯 우리 동양적 사고방식에는 벌을 준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단절시킨다는 것이라는 엄격한 사회적 통념이 숨어있다.
지금 한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비행(非行, 卑行?)을 규탄하고 있다는 소식에 접한다. 작가로 알려진 어떤 정치인이 고대 희랍의 비극서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을 들먹이며 한 거짓말장이를 두둔하는 궤변에 귀를 기울이면서 모종의 교훈을 터득한다. 대체로 그런 교훈은 ‘나는 절대로 저러지 않겠다’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유식한 용어들이 큼직큼직하게 등장하는 변설은 듣는 사람들은 겁박을 당하는 심리다. 게다가 어떤 비극이건 슬픔을 유린하는 비극의 클라이맥스쯤에 관객이 눈물을 질질 흘리는 감성을 십분 활용하는 수법은 실로 그 효력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비극에 심취하는 이유는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정신작용 때문이며 그래서 비극의 효과는 시쳇말로 힐링(healing)이라는 달콤한 이론도 나온다.
카타르시스는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뜻. 굳이 문자를 쓰면 ‘정화(淨化)’라 한다. 무대 위의 연극배우들이 허구적 차원에서 빚어내는 비극은 공포와 연민의 감성을 성심성의껏 자극하여 관객들의 불순한 정념(情念)을 깨끗이 세척해주는 효능을 발휘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론이다.
‘catharsis’와 깊은 연관을 맺은 약 ‘cathartic’은 하제(下劑), 쉬운 말로 ‘설사약’이라는 사실이 불안할 정도로 역설적이다. 나이 지긋한 당신이 대장경 검사를 받기 전날 저녁에 5분이 멀다며 화장실로 달려가게 하는 물약! 그런 ‘cathartic’의 책무는 다음날 아침 내과전문의가 내시경으로 훑어보는 당신 큰창자의 속내가 깔끔해 보이도록 준비하는 데 있다.
인류 최초의 언어예술을 분석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서사시(敍事詩)보다 비극이 우월하다고 설파한다. 인류 최초의 서정시는 공포와 연민을 주춧돌로 삼은 비극에서 비롯됐다.
비극의 그림자로 몸을 가리고 공포와 연민을 앞장세우는 감성 품팔이에 정서의 지갑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들 또한 숱하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의와 불의의 갈림길에서 정의 쪽으로 팔을 벌리겠다는 판단을 내린 양심적인 사람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정의는 이긴다’ 하며 힘껏 소리치며.
©서 량 2019.09.22
--- 뉴욕 중앙일보 2019년 9월 25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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