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컬럼| 352. 내 상황 속에 내가 없다

서 량 2019. 12. 16. 10:54

 

환자가 내게 대충 이렇게 말한다. “형이 정신병이 있었고, 누나는 유명한 재즈 가수였고, 아버지는 내가 두 살 때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평생을 쇼핑몰에서 일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다가 마침내 나는 응수한다. “모든 집안 식구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하면서도 본인 자신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게 흥미롭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게 뭐가 잘못된 거냐고 거칠게 반응한다.

 

환자가 부모와 형제자매에 대한 원망심을 털어 놓고 싶어하는 마당에 내가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는 세션이면 세션마다 쉬임 없이 똑같은 카타르시스 시나리오에 매달리고 나 또한 끈임없이 똑같은 사연을 귀담아듣는다. 정신상담이 증오심의 배설에서 그치는 경우에 더 이상 아무런 진전이 없는 제자리 걸음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은 끔찍하게 힘이 드는 일이다.

 

어떤 환자들은 상담사가 자기 엄마가 아니라는 현실을 평생동안 깨닫지 못한다. 때로는 상담사를 원망하는 지경에 몰입하기도 한다. 사사건건 남들만 안중에 있고 자기 자신은 그림 속에 없는 그림을 그리며 산다. 나는 환자에게 노골적으로 지적한다. -- “Do you know you are not in your own picture?”

 

내로남불만 해도 그렇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내 로맨스는 로맨틱한 ‘상황’이다. 상황은 상황일 뿐. 내 환자의 과거에 자신이 없는 것처럼 내 상황 속에 나는 부재한다. 하지만 남의 불륜은 불법성을 띈 한 ‘사람’의 성향이 큰 문제다. 로맨스는 상황 탓이고 불륜은 사람 탓이다.

 

로맨스를 주제로한 그림은 인적이 끊긴 갈대숲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녀가 보일까 말까 하게 움직이는 영상이다. 이 낭만적인 장면이 우리의 감성을 파고든다. 반면에, 불륜이라는 그림은 운동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고개를 숙인 채 검찰청에 출두하는 한 남자가 쫓기듯이 걸어가는 영상이다.

 

내로남불을 내세우는 정치인들을 인터넷에서 본다. 누군지 “나는 상황이다,” 하며 자신을 변명한다. 자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 그러나 상대는 나쁜 사람이라는 취지다. 유명한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가 떠오른다. 내로남불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사람 중에서도 나쁜 사람만 눈에 띄는 모양이다.

 

내로남불을 영어로 ‘My Romance, Your Adultery’라 옮겨야 하겠다.

 

‘romance’는 ‘Romance language‘ 즉, 라틴어에서 파생된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불어같은 언어로 14세기에 출발한 문학을 뜻하다가 지금은 연애라는 의미로 통한다. ‘adultery, 간통, 불륜’은 라틴어에서 어떤 쪽을 향한다는 ‘ad’와 변경한다는 ‘alter’가 합쳐진 합성어. ‘adultery’에는 한국 정치인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쓰는 개혁이라는 뉘앙스가 숨어있다. 그 컨셉이 부부관계에 적용되는 것이 역설적이다.

 

한국에 불륜이 불법이던 시대가 있었다. 2015년에 한국은 간통이 더 이상 불법이 아니라는 대단한 혁신을 일으켰다. 내 로맨스는 고사하고 남의 불륜 또한 엄밀히 말해서 불법이 아니라는 이론이 나온다.

 

로맨스이건 불륜이건 우리는 남을 크게 비판하지 못하는 시대에 접어드는 것 같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우리 정치인들이 내로남불을 들먹이면서 목에 핏줄을 세우지 못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그때쯤 우리는 남을 탓하는 긴장감 없이 어떻게 지낼지 궁금하다. 평화가 철철 넘쳐나는 그런 나른한 나날이 지속될 것인지.

 

 

© 서 량 2019.12.15 

--- 뉴욕 중앙일보 2019년 12월 18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7869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