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는 성격장애에 시달리는30대 중반 백인이다. 내 시각으로는 저 자신 때문에 줄곧 시련을 겪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기는 항상 남들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떠들어대는 키가 훤칠하고 허우대가 멀쩡한 놈이다.
제임스 아버지는 거의 매일 그에게 손찌검을 했던 고주망태 술주정뱅이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 7살 때부터 그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뉴욕 빈민가 부랑자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경찰에게 여러 번 체포됐고 결국 법정에서 정신이상이라는 판정을 받은 후 내 병동에 입원 중이다.
나는 그에게 가끔 동정심을 품는다. 어릴 적 트라우마 때문에 한 맺힌 인생을 살아왔구나 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에게 적극적으로 친절하거나 따스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한이 많은 사람에게 함부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다. 조만간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가해자로 만들고 스스로는 피해자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얼마 전 그에게 쓴 소리를 했다. 비록 과거가 자기 잘못이 아니지만 현재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 “Your past is not your fault. But you are still responsible for your present.” 그는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야, 너는 남들이 네 한을 풀어준다는 기대를 하기보다 네 스스로 자신의 한을 풀도록 힘을 써야 된다,” 하며 훈시를 하고 싶지만 그런 말을 하면 역효과가 난다. 게다가 나는 ‘한’을 영어로 어떻게 설득력 있게 표현할지 모르겠다. 한은 우리 한국인들 고유의 특징적인 감성이다. 그런 정서를 미국인에게 적용한다는 것이 매우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恨)은 사전에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이라 나와있다. “Very resentful, unjust, or regrettably saddened hard mind”라 옮길 수 있지만 그런 복잡한 설명을 이해할 제임스가 아니다. 가까운 뜻으로 “resentment, 원망(怨望)”이라 할 수 있겠지만 원망과 한은 전혀 다른 감성이다.
‘resent, 원망하다’는 고대 불어에서 ‘다시 느낀다’는 뜻이었다. 우리의 한과 비하여 서구적 한은 이렇게 싱겁기만 하다. 뭘 다시 느껴?
한에는 여러 부정적 정서가 응어리져 있다. 그 멍울이 풀어지면 한이 없어진다는 희망이 솟는다. 자신의 한을 스스로 푸는 독립심을 독려하는 것이 서구적 치료법! 내 한에 대하여 남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과거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바꾸도록 주선해주는 데서 그친다.
아니, 아니다. 남이 내 한을 풀어줄 수도 있다. 우리 민속신앙에 뿌리 박힌 무속문화에 귀의하면 되겠다. 죽은 자의 한마저 깨끗이 풀어주는 씻김굿을 하는 무당의 위력이 아닌가. 어릴 적 옆집에서 밤새도록 울리던 4분의 4박자 살풀이 리듬이 귀에 쟁쟁하다.
무당은 자신이 말려든 한스러운 처지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무당이 되고, 그때 몸에 생긴 힘과 능력으로 남들의 한풀이를 해낼 수 있는 권능을 향유하게 된다.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인용
자신의 한을 극복한 무당이 남의 한을 풀어준다는 설정이 마음에 든다. 마치 정신분석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정신분석가가 환자 마음을 분석해서 트라우마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것과 비슷하다. 꽹과리를 치며 춤을 추는 대신 교묘한 말로 제임스의 한을 원껏 풀어주는 굿을 벌이는 환상에 휘말리는 언어의 무당이다, 나는.
© 서 량 2019.08.11
--- 뉴욕 중앙일보 2019년 8월 14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잠망경>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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