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130

하늘에 맨 그네 / 김정기

하늘에 맨 그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서- 김정기 모든 시간을 냉동했다가 다시 펼칩니다 캄캄한 절벽도 지나 햇볕 드는 아침도 달뜨는 밤도 함께 맞아요. 휘영청 하늘에 몸을 기대어 궁전에 디딘 아픈 발 단아한 당신의 붓으로 뜨거운 조선의 피 찍어내고. 수런거리며 하루하루가 문 앞에 당도 할 때마다 아직도 꿈꾸는 당신의 눈물로, 하늘위에 칠하는 넘치는 빛깔로 허공에도 색깔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허기진 바람도 잠든 역사의 땅에 책을 들고 당신은 아름다운 그림자로 누웠습니다. 캄캄한 절벽도 지나 대륙의 동터오는 새벽을 300년 틈새를 헤치고 우리 함께 맞아요. 진물 나고 덧나서 쓰라린 이야기도 말끔히 씻고 창공이 무서워 썩은 어둠 지나서 휘휘 그네를 타요 발톱에 찍히는 바람의 무늬 오그라들어 점 하나로 남는 ..

꽃 수리공 / 김정기

꽃 수리공 김정기 바람에 시든 여린 꽃잎 하나 입김 불어넣는 나는 평생 꽃 수리공 가녀린 대궁 뼈에 주사를 놓고 사위어가는 촉수에 힘살을 보태어 잎 위를 긁은 칼자국을 꿰맨다 치과의사가 이빨을 수리하고 미장이 지미가 앞마당을 고치듯. 몸을 이루는 살과 잠과 적멸 죽음에 엉겨 찢어지는 꽃의 몸에 가는 바늘 비단실로 수놓아가지만 얼마나 갈런지. 우리가 함께 누리던 미움도 어루만지는 날이 오리니 슬픔이 없는 순간을 꽃술에 꿰어 목에 걸고 잠들지 못하는 세상에서 함께 나누어 철 따라 바람에 새 옷을 갈아 입히지만 보수도 없는 꽃 수리공 © 김정기 2014.04.17

강물의 사서함 / 김정기

강물의 사서함 김정기 강물이 풀리면 봄이 온다네 샛강이 나은 수많은 바람들이 목을 축이며 찰랑이는 물결 위에 눕네 아무 말이 없어도 몸은 풀리고 허물어지는 살결에 새겨진 이름 석자 달려오면서도 일그러지지 않은 문패를 곳곳에 달고 잊어버린 주소 앞에 흘러가네. 강기슭에 부대껴 깨어진 물방울끼리 모여 독한 그리움으로 엉겨 붙고 손 놓아준 강물에게 소식을 물어보네. 어디쯤 모래벌에 웅덩이를 파고 함께 흐르지 못하는 외로움도 묻어두고 뒤에 오는 물결에서 번지수를 찾는 봄 편지. © 김정기 2014.02.15

상어잡이 / 김정기

상어잡이 김정기 매일 마지막 보는 햇볕과 바람에게 손 흔들며 거친 바다에 뛰어든다 물의 무게를 버티면서 조금씩 잦아든다. 날렵히 헤엄치며 다가온 상어는 얼굴 붉히고 눈 맞추고 돌아갔다. 다시 돌아왔다. 황량한 물살에 먹히는 시간들이 반짝이기 시작할 때 내 곁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눈물겨워지는 것은 난해한 바다 속의 풍경으로 인함일까 형광색으로 빛나는 삭신을 들켜 쥐고 돛을 편 형상의 지느러미에 숨은 찰진 속살에 반해버린다. 어디를 가나 상어 떼는 있고 내 손엔 펄떡이는 상어들이 살아있다. 상어들은 모래사장도 밤바다도 환하게 밝히지만 삭아가는 정신의 근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 김정기 2014.01.25

현기증 / 김정기

현기증 김정기 눈을 감으면 보입니다. 이별이 아깝던 날 청춘의 눈물이 눈을 뜨면 안개 망에 걸려온 저녁 빛 숨지는 햇살에 당신이 가고 다시 오는 질긴 동아줄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산들이 기우뚱하고 흔들릴 때 부서지는 뿌리에 매달린 나무들의 애달픈 사랑 때로는 속을 드러내서 빛나는 최후를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풋풋했던 기억의 방에 들어가 드디어 당신을 놓아 주었지요 만지면 모두 하늘이 되는 땅 위의 형체도 이제 놓아버립니다. 막막한 길을 걷는 맑은 피가 균형 잃은 몸을 그래도 받혀 줍니다. 아득해서 더욱 가까운 시간의 눈빛을 마주보며 이 자리가 황홀합니다. 나는 완벽한 흰빛이 되어있습니다. 11월30일 © 김정기 2013.12.02

전어구이 / 김정기

전어구이 김정기 지난 여름 가장 뜨거웠던 날 마당 어귀 잔디를 태우던 불볕 한 타래 먹어버렸다 몸에서 나오는 보드라운 가을볕에 나뭇잎의 피부는 헐거워지고 작은 몸에 오팔 갑옷을 입었다 솔가지 불 속으로 뛰어든 한입 살점 집 나갔다 돌아온다는 속설에 덜미 잡혀 저녁상에 올릴 쓸쓸한 반찬. 그동안 버렸던 꽃나무를 몸에 심고 언젠가 바다를 떠나 빛나는 모형의 비늘로 팔려가기를 기다린 차가운 눈빛은 연기에 묻혀있다 © 김정기 2013.10.03

회색 세상 / 김정기

회색 세상 김정기 가끔 물감은 펑펑 쓸어져 몸에 달라붙는다. 회색에 점령당한 채 세상의 색깔은 없어져 오히려 단아하다 청동색 파리 몇 마리 잡고 여름을 떠나보내며 그 색조가 지워지는 떨림을 듣고 새 계절의 만남이 저리고 저리다. 시간이 걷어 간 색채를 돌려받으려 손가락을 펴 회색 그림자를 모조리 지우고 여자는 날마다 새로운 무지개를 그린다. 일곱 가지 빛깔은 계속 회색에게 침범 당해도 털실로 모자 떠서 쓴 랩 가수의 음정처럼 계속 세상은 채색된다. 칠해도 칠해도 세상은 아직 회색 그래도 단풍에 뒤덮여 끝없이 달려갈 회색 세상 © 김정기 2013.08.29

초록 멀미 / 김정기

초록 멀미 김정기 잎들이 밀려온다 도처에서 초록 폭탄에 맞아 숨졌던. 우리는 오랫동안 푸를 줄 알고 외면해버린 아까운 나날 이제 다시 색칠해도 빛 바래져 젖은 잎들만 누어있다. 어둡지 않으면 볼 수 없던 반짝임을 이제 나누어 갖으려 숲으로 간다. 당겼다 놓은 화살이 살갑게 박혀 올 때 불길이 되어 활활 타오르는 초록의 얼굴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져서 초록 그을음에 온몸을 사루며 세상 고개를 넘는다. 고향집 안방 벽지에 그려진 색깔에 구토하던 건방진 젊음이 흔들린다. 사방이 거무스름한 벽으로 다가오는 저녁마다 엽록소 한 방울에 타는 입을 추겨 잊어버린 이름을 떠올리면서 살아난다. 넉넉한 품에 숨어서 숨 쉬는 고요가 초록 번개에 기절한 낮잠을 깨운다. © 김정기 2013.07.08

남은 손가락 / 김정기

남은 손가락 김정기 아프리카 어느 섬에는 가족이 떠날 때마다 손가락 하나나 귓바퀴를 잘라 그 아픔으로 이별을 대신한다고 한다. 날카로운 열대의 잎으로 생살을 베이며 상처가 아물면 혈육을 잊지만 또 다음 이별이 오면 다음 손가락을 잘라 다섯 손가락이 없는 그는 어디 육신의 아픔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통증에 비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평생 정을 그리워하는 그의 유언이다. 남은 손가락으로 일하면서도 열 손가락의 힘을 일궈내는 사내의 미소가 화면에 뜰 때 나는 절벽 끄트머리에 무겁게 앉았다가 무중력의 세상으로 가볍게 떠오른다. © 김정기 2013.03.02

백 년 전 / 김정기

100년 전 김정기 100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을 삭이기에 충분한 고요인가 이 건물에 가득하던 풋풋함 모두 어디로 갔을까 헤픈 웃음도 문안에서 졸아들고 여자의 허리에 매달리던 굵은 목소리 공중분해 되고 바람도 서로 껴안던 진주 목거리 풀어져 흩어져서 떨고 있다. 나뭇잎이 내려앉은 스카프에 낡은 실밥 하나 방에 성에 끼던 견뎌내기 어려운 추위 연필로 베껴 쓰던 연서는 세상의 창문을 모조리 닫아걸었지 어두움은 온몸을 덮쳐왔지만 손끝에 닿는 씨앗들 공중에서 떨어지는 빛으로 옷을 지어 입고 길 떠나던 백 년 전 어느 날 한 사람의 세월을 몰래 본다. © 김정기 201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