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초록 멀미 / 김정기

서 량 2023. 1. 9. 03:21

 

초록 멀미

 

                            김정기

 

잎들이 밀려온다

도처에서 초록 폭탄에 맞아 숨졌던.

 

우리는 오랫동안 푸를 줄 알고 외면해버린 아까운 나날

이제 다시 색칠해도 빛 바래져 젖은 잎들만 누어있다.

어둡지 않으면 볼 수 없던 반짝임을

이제 나누어 갖으려 숲으로 간다.

당겼다 놓은 화살이 살갑게 박혀 올 때

불길이 되어 활활 타오르는 초록의 얼굴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져서

초록 그을음에 온몸을 사루며 세상 고개를 넘는다.

고향집 안방 벽지에 그려진 색깔에 구토하던

건방진 젊음이 흔들린다.

사방이 거무스름한 벽으로 다가오는 저녁마다

엽록소 한 방울에 타는 입을 추겨

잊어버린 이름을 떠올리면서 살아난다.

 

넉넉한 품에 숨어서 숨 쉬는 고요가

초록 번개에 기절한 낮잠을 깨운다.

 

© 김정기 201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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