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130

그늘의 색깔 / 김정기

그늘의 색깔 김정기 오랫동안 그늘에 있다 보니 그늘에도 색깔이 보인다 되도록 노오란 그늘에 머물러 했지만 언제나 바탕은 진회색이었다 검은 바위가 들어앉은 듯 무거웠지만 가는 손가락을 펴 뒤집으니 밑둥에는 아지랑이가 묻어 있었다 반짝이는 진흙 가루로 얼굴을 치장하니 고향집 우물에 나르시스가 된다 외로움은 번져오면 색깔이 되는지 장미 가시가 등줄기에 박혀 스스로 그늘을 찢고 숨어 사는 집에 색칠을 한다 © 김정기 2020.03.21

넘어지다 / 김정기

넘어지다 김정기 쓰러지진 않았다 결코 잡을 수 없는 시간의 뒷덜미를 낚아채고 일어섰다 비 내리는 정원에서 어린 날 장터에서 70년대 청와대 앞에서 우리 집 거실에서 넘어지다. 그냥 쓰나미로 덮쳐오는 나이에 밀리지 않으려 삭아가지 않으려 해도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다 달빛은 숨을 죽인다 젖은 바람도 비켜간다 산이 허물어지고 강물이 멈춰도 힘센 손에 들려서 다시 일어섰다 넘어져도 보이는 햇살 만져지는 바람결 멀어져 간 내 몸에게 사과한다 © 김정기 2019.12.07

진달래꽃 / 김정기

진달래 꽃 김정기 잠깐 잠든 사이 울타리에 진달래꽃 피었네 눈길을 피하려다가 들키고 만 꽃송이가 눈치를 보며 혼자서 귀뿌리를 붉히네 꽃잎들은 흩어진다 해도 남한강 노래를 흥얼거리며 안개 바다에 익사해도 오염된 대륙을 건너 바람도 거센 사막도 지나 당신의 뒷모습 따라 눈시울 적시며 새로 움트는 색깔로 고향 뒷산에 진달래로 태어나는 꿈을 꾼다네 봄의 무늬가 지워진다 해도 바람부는 계절의 틈새에 서서 꽃으로 지는 허공으로 걸어가리 © 김정기 2019.04.20

봄, 우주 / 김정기

봄,우주 김정기 그대는 다른 행성의 언어를 쓴다. 그 소리들이 껍질을 뚫는다 허물 벗은 소나무 새순이 발그레하다가 연두가 들어있는 봄의 첫줄 첫사랑의 눈빛이다. 가버린 날에 살던 땅에서 카톡을 보내온 냉이 꽃다지 원추리에 들어있는 우주의 창문이 열린다. 벌거벗은 공기들이 손을 내밀면 폭죽으로 터지는 여린 입김 자라나는 법을 터득한 직선을 그으면 떠난 계절의 남루를 벗어버리는 우리의 지난 날이 넘친다. 책상 위에 먼지 한 알 봄을 신은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새살이 돋는 모양새까지 눈여겨 보아지는 새로 열리는 날들 번지는 색깔에 꽃 편지 쓰는 당신은 봄, 우주 © 김정기 2019.02.27

카이로스*의 잠 / 김정기

*카이로스의 잠 김정기 냇가에 앉아 있으려고 집을 나섰다 닳지 않는 펜을 집어 들고 흐르는 물에 헹구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하늘을 퍼다 바위 위에 깔아 놓는다 카이로스는 언제나 하늘 위에 누어 선잠을 잔다 내 몸의 소리가 들릴 때 그는 깜짝 놀라 깨곤 한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 짓고 아니면 돌아눕는다 새벽 녘 내가 하늘을 거두어 올리면 그가 새가 되는 것이 눈에 들어와 하늘을 본다 하늘은 흐리고 새는 빛이 된다. 발 밑 냇물은 맑고 펜은 닳고 닳아 떠오른다 *옆집 개 이름 © 김정기 2019.02.27

넷이라는 숫자 / 김정기

넷이라는 숫자 김정기 여덟에 매어서 넷까지 덩달아 좋아했던 길 그 길가에 차 네 대가 주차하고 하필 그 네 번째가 새로 뽑은 차 8444일 때 네것 내것 가릴 것 없이 한참동안 황홀해짐을 누가 막으랴 꿈이 넷이라면 둘까지도 아끼며 걸어 온 길에 아직도 자갈들 구르지 않고 이끼 묻어 비바람 뜨거운 볕 당해내고 있으니 둘을 버리고 넷을 버리고 여덟까지 내던지고 앉은 섣달 초승 그래도 오늘아침 싸락눈이 잠깐 내리고 참새 떼가 마을로 날아 들더라 위트니 박물관에서 백 년 전 나뭇잎들을 쓸어 담아가지고 집에 와서 쏟으니 네 바구니 여덟 바구니를 채우려면 또 한 번 가 보아야 하겠네 세모의 어느 토요일 아침 어떤 백인 노부부처럼 품위 있게 손잡고 거기는 여덟층이 없으니까 사층에서 맴돌자 선으로 색으로 엉클어놓은 사..

물감옥 / 김정기

물감옥 김정기 물속을 걷는다 집안에서도 어디를 가도 물 컴퓨터 앞에 앉아도 물이다 헤엄도 못 치면서 물에서 살다니 걷어내야 할 거품도 껴안고 헐벗은 말들만 뛰노는 광장에서 하루해를 적신다 허둥지둥 달려온 길만 햇볕을 쬐고 아득한 것들만 모여 사는 동네에 아직도 낯설기만 한 물감옥의 주소를 쓴다 어디 까지가 물길이고 바람 길인지 분간 못하는 지점에 와 있구나 물결이 바람이 되어 밀어 닥쳐도 여기는 따뜻하고 온화하다 어둠의 척도도 잴 수 없는 물 속 그래도 당신은 여기까지 따라와 내 등에 물기를 닦아주고 있다 언제까지 물 안에서 대답하지 못하는 세월의 등마루에서 조금씩 잠들어가고 있는 의식세계에 연두 풀잎 한 잎 눈앞에 자란다 © 김정기 2018.08.21

꽃이 지는 이유 / 김정기

꽃이 지는 이유 김정기 꽃이 지는 것이 혹시 내 잘못이 아닐까 책상 위를 기어가는 벌레 한 마리 잡아서 바람에 꺾인 나무 가지를 내버려두어서인가 추위에 떠는 옆집 개를 그냥 바라만 보아서인가 새로 피어나는 연한 잎을 끓는 물에 넣은 탓일까 곁에서 빛나는 사람들 이름도 나와 함께 흐려지고 햇볕과 시간이 공모하여 제철이 저물어가면서 나도 시들어 사방으로 흩어지며 떨어지고 있으니 꽃들도 동행이 되려고 지고 있는 것일까 검은 흙에 묻히려고 설레는 것일까 꽃이 저야 떠난 사람이 돌아온다고 약속을 지키려고 지고 있는지 땅 위에 떨어진 꽃잎을 집어 들으니 흘러간 날의 황홀한 필름이 혈관에 스며든다 조치원 역에 서있던 꽃다운 당신이 선명하게 상영된다 막을 내리지 않고 눈물겹지 않게 아직도 숨이 멎듯 달콤하게 그래서 꽃..

산벚꽃나무 숲 / 김정기

산벚꽃나무 숲 김정기 바람 소리는 푸른 산울림이 되고 추위에 멱살을 잡히던 숲은 그루터기까지 떨고 있었는데 깊이 흔들리며 지나온 날들의 햇살 그 눈부신 설렘을 안고 내 안에 한 그루 자라던 산벚꽃나무 어린 태를 벗으며 달라지기 시작하여 숲에 가도 끼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대만 보면 눈물짓던 버릇도 버리고 그 숲에 발을 딛고 좁혀온 간격 있는 언어 아직도 그 이름만으로도 눈이 떠지는 자리 가지는 가지대로 엮인 자태에 매혹되어서 사철 봄 냄새로 가득 채웠다 우리는 휘청거리지 않았지 혼자라도 향기로웠지 어두워도 빛이 보였지 닿기만 하면 불이 켜지던 청춘을 거머쥐고 먼 길을 왔다 남은 시간도 꽃잎에 이슬로 태어나려고 한 점의 얼룩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한 분홍이 되기 위해 여기까지 초록의 부축을 받으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