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130

우주의 봄 / 김정기

우주의 봄 김정기 그대는 다른 행성의 언어를 쓴다. 그 소리들이 껍질을 뚫는다 허물 벗은 소나무 새순이 발그레 하다가 연두가 들어있는 봄의 첫 첫사랑의 눈빛이다. 가버린 날에 살던 땅에서 카톡을 보내온 냉이 꽃다지 원추리에 들어있는 우주의 창문이 열린다. 벌거벗은 공기들이 손을 내밀면 폭죽으로 터지는 여린 입김 자라나는 법을 터득한 직선을 그으면 떠난 계절의 남루를 벗어버리는 그대의 지난 날이 넘친다. 책상 위에 먼지 한 알 집 앞을 뛰는 백인여자의 신발 물집이 생겨 새살이 돋는 모양새까지 눈여겨보아지는 새 날들 번지는 색깔에 꽃 편지 쓰는 그대는 봄이다 © 김정기 2016.04.07

뼈의 은유 / 김정기

뼈의 은유 김정기 처음으로 뼈들이 사는 마을을 기웃거렸네 어느 날부터 그들은 수런거리기 시작했고 낮은 울음이 낯익어 놓아주려고. 그래도 모반은 면하려고 잘 드는 가위로 싹둑 잘랐네 그런데 흔들릴 때마다 쏟아지는 가루백묵 닳고 삭아서 마른 소리가 난다. 미안하게도 그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네 허물어지는 관절에도 유혈은 없다. 아직 껍질 안에 있는 길을 살피며 점점 젖어가는 옷 안에 잔뼈들의 흐느낌이 들리는 한밤 오금이 저리고 떨리는 삭신을 들켜 쥔다. 빼앗긴 칼슘에도 반란은 일어 오래된 침묵에 뼈아픈 것들이 숨어사는 곳에는 눈물에도 뼈가 있었네 바람결에도 뼈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나니 멀지 않은 길이 아득하다. © 김정기 2016.02.04

가을 맨해튼 / 김정기

가을 맨해튼 김정기 골목들은 엎드려 있었네, 숨죽인 그대 따라 떠나가는 것에 익숙해진 오늘은 이방인의 굽은 등 어루만지며 흔들리는 타향도 마지막 발길에 떠내려가고 플라자 호텔 녹 쓴 지붕에 묻었던 가을 햇살 이제는 눈물 없이, 쓰라림도 없이 올려다보았네. 고개 숙인 잎도 얼굴을 들던 날 빛나는 슬픔이 몰려와 한 솔기 바람을 만들었네. 그대의 침묵이 6 애비뉴를 녹이고 깨어진 가을 달을 다시 띄우고 강물을 끓이고 백만 개 태양을 잉태하는 불씨로 살아나고 살아나서 불을 피우네 땅거미가 덥힌 도시의 속살을 헤집고 쇼윈도 안에 펄럭이는 옷깃 조용히 전등이 켜지네 © 김정기 2015.11.18

뚜껑 / 김정기

뚜껑 김정기 우리가 숨겨 두었던 가락을 풀어 모아 병에 가두고 뚜껑을 닫았네 빛은 빛 대로 노래도 병에 갇히어 꼼짝하지 않았네 뚜껑을 닫고 가끔 향기는 향기대로 맛은 맛 대로 포장되어 잠깐 씩 열어 즐겼지 어느 날 오른손은 무엇이던 한다고 설쳐 댔지만 뚜껑은 도사리고 침묵하고 책장도 붙은 대로 왼손이 쉬는 동안 집안에 뚜껑은 끝없이 줄 서고 넘겨야 할 책장은 수북했네 열린 것들은 정도를 벗어난 모습으로 시들어가고 이제라도 황급히 뚜껑을 닫으나 이미 때는 늦었네 간직한 사랑은 공기에 약하고 이별은 되돌리기 어려워 시나브로 멀어져 갔네 변질된 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뚜껑이 열린 세상을 향해 어진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나를 찌르려 했네 그러나 눈부신 빛 아래 선연히 들어낸 안으로 조인 단단한 뚜껑은..

여름 형용사 / 김정기

여름 형용사 김정기 여름 한낮에 움직이는 고요는 한마디 형용사다. 언제나 뒷그림자에 숨은 여린 얼굴도 그늘에 일렁이는 영화 장면이 된다. 멀리 있는 줄 알았던 팔월도 눈앞에 다가서니 벌써 나는 얼마큼 와 있는지. 아까워하던 아침저녁의 노을도 시름시름 가던 날도 정오의 뙤약볕에 뛰어간다. 진작 간수하지 못한 나날도 녹아 흐른다. 헐겁게 빠져나간 외로움까지도 찾을 수 없는 한낮 등을 보인 친구에게 여름을 주려고 손을 내민다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기에 더 환하고 더 부드러운 것이 없기에 맞바람 치는 창가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바람에 실려 오는 풋내 여기서 모두 정지하기를 거둘 것이 아직 있으면 나누기를 지금 땅 밑에도 여름볕 밝게 드리워 주황색깔 나리 꽃잎 지는 여름 형용사 © 김정기 2015.07.19

봄의 혈관 / 김정기

봄의 혈관 김정기 볕 잘 드는 툇마루에서 졸다가 깨다가 눈 속에서 깨어난 달래 순을 만진다 아무것도 모르고 고개 숙여 어떻게 참았는지 아직도 남았을까 그대의 향내가 땅이 흔들린다 명주실 풀어놓은 햇살에 몸 담그고 사람이 할 수 없는 말을 하면서 달콤한 잠에 빠진다. 콸콸 흐르는 도랑물에 우리는 발을 씼었지 어둠 저편에서 쏟아지는 빛이 고여 흘러간다. 봄은 언제나 흙속에서 헤모글로빈을 싹 틔우고 있었지 끝내 되돌릴 수 없는 미로를 걸어가서 이슬비가 스며든 산수유 잎을 만지네 그대가 돌아오는 저녁을 되돌려서 겁도 없이 방문한 들판에 비석을 세우고 먹어도 지독하게 허기진 이 땅에서 눈 녹은 물이 출렁이는 봄의 핏줄은 차고 맑은 눈물이네 © 김정기 2015.04.01

아홉이라는 숫자 / 김정기

아홉이라는 숫자 김정기 서서 울고 있다 평생 그는 서있었다 앉거나 누우면 여지없이 허물어지므로 서서 하늘을 지키고 있었다 노을이 지고 새해가 닥쳐오니 또 한권의 일기장을 9불 99센트에 샀노라고 성탄카드에 썼다 숨어있는 우리말을 찾으려고 9th Avenue 골목길에서 모래로 삭아가는 돌집을 이고 비에 젖어 서 있다 은빛 머리가 더욱 빛나 극치에 도달한 모습으로 겨울의 평화를 땅 위에 내려놓으며 그는 조용히 깨어나고 있다 © 김정기 2015.01.23

샌들을 신은 여자 / 김정기

샌들을 신은 여자 김정기 친구가 켜준 촛불도 아들이 보내 온 꽃들도 며칠이 지나니 흐늘거린다 에드워드 하퍼는 내가 태어난 해 뉴욕의 극장가 남빛 드레스에 샌들을 신은 여자를 그렸다 여자는 칠십 사 년이나 샌들을 신은 채 서있고 밟은 땅을 파고 또 파면 충청북도 내 친구네 사과밭 어귀에 구멍이 날수도 있겠다 하루에도 몇 번씩 풀어진 샌들 끈을 옥조이면서 선연한 사랑에 기절하는 도대체 저 여자가 낚아챈 마지막 설렘은 무엇인가 끝 간데없이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동갑내기의 쓸쓸함인가 아직도 젊은 날의 약속을 믿고 그 자리에 서있는 여자의 발엔 촛불이 켜지고 꽃들이 살아날 듯 팽팽한 샌들이 신겨 있다 © 김정기 2015.01.05

꽃이 무겁다 / 김정기

꽃이 무겁다 김정기 양귀비 꽃잎 한 잎 땅에 떨어지니 지구가 기우뚱한다. 꽃 구들에 누어 단잠 자고나서 태워도 줄지 않는 땔감이 되는 꽃에게 말을 건다. 그 꽃 머리에 꽂고 손잡던 날이 있었던가 이제 당신 손에 내가 끌려가고 내 손에 당신이 다가오는 성근 머리엔 꽃구름이고 그래도 우리는 화원으로 가자 아직도 풋내 나는 눈물을 서로 닦아주며. 초록이 세상을 덮던 대낮 머리에 꽃 꽂아주던 사람이 뒤돌아보아도 그만인 사람같이 떠나버리고 남겨두고 간 흔적 땅을 파고 또 파서 기억의 통로에서 버려진 꽃잎 한 장 무거워도 바람이 되어 나른다. © 김정기 2014.12.8

나팔수 / 김정기

나팔수 김정기 나팔 소리에서 은가루가 부서져 내린다. 몸에 있는 공기는 모두 빠져나가고 홀쭉해진 세포마다 소리가 난다. 나팔을 불면 떠난 사람이 돌아온다. 나팔 부는 사람은 나팔로 말한다 길게 늘어지게 나팔을 불면서 세상을 돌면 세상에 숨어있는 그대의 숨소리가 들린다. 음정마다 뽀얀 망토를 입고 텅텅 빈 몸으로 흐린 거울 속에 얼 비취고 있는 목소리 한 번만 더 들을 수 있다면. 온몸에 피가 나팔로 빠져나가도 그대가 그 소리 들을 수 있다면. 나팔을 입에 물고 거리로 달려 나가겠네. 흰 눈 같은 은가루를 뒤집어쓰고 터진 허파에 바로 그 나팔수 안에 그대가 숨어있네. © 김정기 2014.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