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詩모음 130

집이 말한다 / 김정기

집이 말한다 김정기 누런 개 한 마리 눈에 넣고 부서져 내리는 은하수를 지붕에 주어 담는다. 담장 너머로 몰래 훔쳐보는 카이오라는 수놈은 아일랜드 사람이 주인이지만 우리가 던져주는 햄 조각에 반하여 우리 집에 낯선 기척이 있으면 짖어 댄다. 순한 눈매를 갖은 그는 희미해지는 나를 데리고 낯선 바다를 건너가려고 한다. 우리 집이 말한다. 그가 건너는 대서양을 따라가면 조국이 더 멀어진다고. 유혹의 팔소매를 뿌리치고 혈혈단신 아픈 다리를 끌고 가지만 고향산천은 멀기만 하다. 뜰에 무궁화, 봉선화, 꽈리를 키우고 정선아리랑을 들으며 여기서 세월을 삭히라고. 집이 말한다. 뉴욕에서 젖은 몸 말리고 무엇이든 서툰 대로 버티면 누명도 벗어진다고. 30년을 살아온 잉글리시 투더형 우리 집이 말한다. 방에 달린 문들도..

산삼 / 김정기

산삼 김정기 그날 산에 가서 산삼 잎을 눈여겨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빛나던 날은 지나가고 산도 헐벗은 계절이 왔다 통증으로 신음하는 늙은 산에 갔지만 오를 수 없는 높이다 내 입술에 말이 멈추고 수족에 힘이 빠졌지만 보이지 않는 꿈은 사다리를 타고 끝없이 올라 그런 기운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제 눈에 보인다 삼 잎이 가득차서 발 디딜 틈이 없다 몸에서 놓여난 넓은 허공에서 뿌리를 캐서 씹는다 하염없이 무거운 삼 기운은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게 되고 면역력은 지구라도 삼킬 듯이 올라가서 잠들어도 깨어 있게 되었다 © 김정기 2017.12.16

불쏘시개 / 김정기

불쏘시개 김정기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헤매고 있으면서 구겨진 모국어를 껴안고 흐느끼면서 문우들에게는 불붙은 꽃이 되라고 높게 키운 불에 눈을 뜨라고 입 다문 그대의 입이 열린다면 몸으로 성냥을 긋고 나를 살라 불길을 만들 수 있다면 산이 부서져 피리가 되는 아궁이에서 젖은 그림자를 말리며 은하가 되리 물결이 되지 못한 물은 강 밑바닥에 가라앉아서도 노래 부르며 타올라 가리, 가랑잎 되어 꽃으로 밀봉하여도 불꽃이 되기 위해 헝클어진 말들을 함께 추려 빗기자고 활활 타는 뜨거움으로 시간을 새길 수 있고 세계 곳곳을 달굴 수 있고 이제 빛나는 별들이 되고 있는 그대들 위해 한줌 재로 조용히 삭으러지리 © 김정기 2017.09.02

파뿌리 / 김정기

파뿌리 김정기 부엌은 흔들렸고 어지러웠다 이제는 맛을 내고 약재로 쓰인다는 향기도 모양새도 없는 파뿌리를 손질하다가 문득 버린 친구의 목소리를 듣는다 손에 잡힌 바다는 얼어 터지고 뜨거울수록 식어가는 여름체온은 날마다 늘어나는 실금이 나의 물독을 깨려고 굵어져만 가고 들키지 않게 지우고 지운다 발을 헛디뎌 떨어진 낭떠러지에서 수많은 뿌리에 매달려 숨을 쉰다 너무 일찍 익혀버린 당신의 얼굴은 온통 세상 가득 돋아나 잊으려 해도 더 또렷한 물방울인 것을 빈 이웃집 벨을 누르며 온기를 거두는 마을에서 발길에 채여 나간 산더미 같은 뿌리들을 한 가닥 씩 씻어서 눕히는 손이 떨린다 돌아올 시간을 장담하며 떠나는 사람들 틈에 뼈들은 더 크게 소리 지르고 검은 머리는 하얗게 세어가고 멀어져간 시간들이 아우성치며 달려..

나무 등걸 / 김정기

나무 등걸 김정기 우리가 버렸던 그들은 말을 못했다 반세기를 눈비 맞고 꼼짝 안하고 있었다 뒤뜰에 나무 등걸 네 개가 서서 쨍한 햇살도 지나갔지만 이제야 돌아보고 몸에 난 구멍에 손을 넣었다. 바람에 날아든 어린 나무 뿌리도 만져지고 마른 기침소리와 말소리도 조그맣게 들렸다 억울했었다는 티도 없이 깊은 흠집에 흙을 받아들였다 그 흙에다 오이 고추도 심으며 달래 보는데 그들은 순순히 물을 받아 식물에게 주고 껴안아 죽은 나무 토막에도 속이 비어가는 세월동안 샌디 폭풍도 견뎠던 날들이 소리치지만 그냥 하나씩 삼켜버렸다 지금까지 온 길이 꿈결이듯 남은 날도 나무 등걸이 되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어느 누구의 손길을 어디로 부는 바람을 모두가 시들어 떨어져도 나무 등걸엔 새싹이 © 김정기 2017.06.28

다시 세모에 / 김정기

다시 세모에 김정기 오던 길 돌아갈 수 있을까 물기 있던 시절 돌아보면 수많은 잎들이 돋아나고 세상은 변해도 여전히 아늑한 오솔길이었다 끌어 모아 가지고 온 것 손에 쥔 것들이 시간 밖으로 떠내려가고 다시 돌아올 친구와 오지 못할 사람이 지나간 바람으로 흩어져 허공에 눕는 세모에 헝클어진 눈앞이 헷갈려 몸을 뒤척이는 땅 화창했던 어제도 잠든 나는 지금까지 어디에서 헤매었나 낡은 이력서 날려버리고 녹 쓴 날 닦고 나면 다시 가슴 뛰는 봄이 오려나 동창이 밝아지려나 그래도 우리는 다시 꿈꾼다 먼 들판 안개 걷어가는 눈부신 새해를 © 김정기 2016.12.30

늦가을 묘지 / 김정기

늦가을 묘지 김정기 비석에 앉은 잎새가 찬이슬에 젖어 있고 국화 화분이 저녁 빛에 노랗다 캔시코 공원묘지에 빗소리를 내며 낙엽이 쌓인다 십년을 누어 있어도 아프지 않다고 당신은 금방 등을 털며 일어나 앉을 듯 눈앞에 있다 내 자리도 준비되어 잔디들은 시퍼렇게 살아 소리친다 풀씨 한 알이 당에 떨어져도 시간 탓이고 한 목숨 묻히는 찰나가 다가서니 이제 버릴 것도 더 가질 것도 헤플 것도 아낄 것도 없다 무섭던 친구에게도 손 내밀고 고요하게 땅에 누워 기다리는 하늘에서 살련다 엊그제 같은 우리의 평생이 떠올라 아이들 어릴 때 사진을 꺼내 보며 이 가을을 누린다 © 김정기 2016.12.23

입양가족 / 김정기

입양가족 김정기 망가진 기억 서성이다 바다를 밟고 온 아이 묵은 옷을 벗어버리고 맞지 않는 새 솔기에 겨드랑이 베인다 출렁이는 머리카락 사이로 유전자가 입양가족의 유리창을 때린다 피는 다르지만 물이 같은 우리는 70 퍼센트 물에 도저히 못이기는 붉은 색 흙 속에 감추어둔 얼룩에 뿌리가 몸부림쳐도 응달은 맥을 놓고 양지가 되는 입양가족은 조금씩 피가 같아진다 말투가 같아진다 조상이 같아진다 발가락이 닮아간다 © 김정기 2016.12.06

흙 갈이 / 김정기

흙 갈이 김정기 꽃나무도 나이 들면서 헛소리를 한다. 십 수 년 묵은 집을 털고 새 흙에 심겨지니 이웃에 낯가림을 하면서 떠난 그늘을 벗어나지 못해 밤새도록 흩어진 친구를 부르다 끝내 실어증을 앓는다. 연한 뿌리들이 감추어둔 얼룩을 찾아 꿈틀대다 꺾이고 상하고 오래된 것들이 살갑지만 낯선 것은 서툴고 불편하다 그래도 새것은 눈부시다. 어두움에 길든 침묵은 햇볕에게 말을 건다. 질긴 끈으로 묶였던 시간들이 토막 나 뿔뿔이 달아나고 뒤섞여도 당신은 거기에 있었구나 창공에서 쏟아진 이름들이 숨긴 어제와 손잡아도 끌어안아도 흩어져버리는 이 땅 한 번쯤 뒤돌아본 당신의 흙 묻은 얼굴 그러나 계속 당신을 향해서만 고개 돌리는 타향 떠밀려온 흙은 그나마 화분에도 못 담기고 버려져 엉겅퀴를 키우지만. 장미꽃과 잡초가 ..

7월 / 김정기

7월 김정기 풀꽃들은 지금도 젊게 핀다 해는 더 이상 늘어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夏至의 뜨거움은 있었지 몸에서 불붙던 긴 낮은 꼬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밤이 조금씩 잡아당겨 덧난 빛깔들 고였는가 집집마다 작은 풀꽃 피어 잦아드는 빛을 밝히고 있다 7월을 건너가지 못하고 떠난 사람의 황홀이었나 하늘에 흐르는 강물 속 찍힌 발자국을 더듬는다 힘센 시간은 비켜가고 다시 산나리도 피어난다 꽃의 뼈가 굳어지면서 꽃 살에 물집이 생겨도 당신은 오늘을 화창하게 한다. 한낮의 적막이 젖어와 정갈한 단어만 물려주려고 땅에서 돋은 별을 주어 들고 계절의 가운데 몰려 있다 얼마큼 와 있는지 가늠 못해도 그 강에 가까이 서있다 한 다발 눈물도 흘려 보내면 그만인 발길도 뜸하다 가벼운 풍경을 몸속에 새기며 앳된 꽃잎 품에 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