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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꿈꾸는 문어

바다 밑바닥을 헤맨다 나는 바다다 나는 밑바닥 시시때때로 변하는 살 색깔 기암괴석 울퉁불퉁한 틈서리를 연신 파고드는 나는 연체동물 바다가 나를 윽박지른다 해도 설령 세 개의 심장*이 내 꿈을 지휘한다 살갗은 꿈 배경 빛깔, 재깍재깍 늘 형형색색 달라지는 전혀 문어가 아니면서 나는 올데갈데없는 문어야, 문어! 당신이 깜짝 놀라 눈을 깜빡하는 동안 발(足) 여덟 개가 들입다 요동치는 꿈이다 완전 나는 * 깊은 바다 밑 기암괴석 위에서 쉬는 꿈을 꾸면 몸이 돌 색깔이 되고, 먹이를 찾아 모래 위를 기어가는 꿈을 꾸면 몸 빛깔이 모래 색으로 변하는 문어는 심장이 셋이야, 셋! 하나는 커다란 머리를 지탱하고 둘은 요동치는 여덟 개 다리를 지휘한다. 시작 노트: 우연히 19년 전에 쓴 시, '문어의 죽음'을 비판적..

2022.07.08

|詩| 베토벤의 무의식

-- 2003년 4월 10일 누이동생 서정선의 작곡 발표회에 참가하여 비엔나 Palais Palffy 베토벤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면서 이마 주름살 깊이 박힌 완고한 생각을 읽는다 오선지 콩나물대가리가 꿈틀대는 밑으로 비엔나 팔피회관 베토벤홀 빨간 양탄자에 편안히 드러누운 베토벤 데스 마스크에서 숨어있는 것들은 끝까지 숨어있을 것이다 베토벤의 아픈 귀가 내 뇌신경을 건드린다 열정 소나타 3악장 첫 소절 꽈당! 무너지는 불협화음이 손목을 비틀면서, 손목을 비틀면서 조금씩 느려지는 리듬감각도 저 무시무시한 무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내 열 손가락에 한사코 매달리는 클라리넷을 혼이 빠지도록 뒤흔드는 베토벤의 무의식에서 시작 노트: 19년 전 내 손가락은 지금보다 재빠르게 움직였다. 속도감이 주는 경쾌감을 과시했을..

2022.06.18

|詩| 동굴 입구

퀴퀴한 동굴 속 낯익은 얼굴들 동물가죽으로 알몸을 덮는 둥 마는 둥 목이며 발목을 쇠사슬에 묶여 어깨만 흔들거리는 몸 그들 등때기 뒤쪽 어머나, 샹들리에 모양 횃불이 타오르는 *동굴 벽 그림자, 사나운 숨소리 굉음으로 울리는 동영상이 엄청 재미있어요 누군지 무엇인가에 질질 끌려 나가 관람하는 동굴 밖 세상 배신자의 무거운 발길이 다시 동굴 쪽을 향한다 땅속 깊이 위치한 동굴 입구 이 텁텁한 우주를 지하, 지상, 천상으로 3등분한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도무지 어떤 놈들이냐? * 플라톤의 공화국 제 7권에서 시작 노트: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고등학교 때 귓등으로만 듣던 플라톤의 동굴 벽 그림자를 다시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 그 스토리텔링은 이상한 공포심을 자극했다. 아직도 나는 젠체하는 플라톤이 무진장 ..

2022.05.18

|詩| 관광여행

그 무엇보다 쓰라리게 감춰진 상처 전면 개방하기 그 어떤 것보다 무서운 권력의 내부구조 낱낱이 탐색하기 장벽을 무너뜨린다는 데야 피치 못할 숙명이라는 데야 YouTube 화면 하단에서 치솟는 답글, 답글, 답글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금단의 땅, 어두운 땅 어리숙한 내 아버지의 비밀을 관람한다 당신과 내 배경음악을 다 끄고 난 후에 시작 노트: 2022년 5월 10일, 청와대가 일반인들에게 전면 개방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YouTube를 정성껏 시청했다. 비밀이 없어질 수록 그만큼 더 비밀이 쌓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권력을 추구하기 위한 비밀은 없을 수록 좋지 않을까. 남을, 남들을, '지배'하는데 쓰이는 비밀은 과연 무엇인가. 애타주의를 표방한 엄숙한 속임수인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동물적 본능인가. ..

2022.05.13

|詩| 대형 TV

*”배우세요? 아니 스턴트맨이야. 스턴트맨이시군요. 그게 훨씬 나아요. 왜 훨씬 나아? 배우들은 가짜이니까요”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해/ 당신은 알고 있어/ 거칠고 고단한 황야의 폭력성을/ 사나운 독수리의 날갯짓을 듣지 못하는 우리의 섬세함을/ 古典이 어이없이 무너지고 있어요/ 예쁜 말은 다 가짜예요/ 라이락 향기가 나를 에워싸네요/ 뒷마당 저쪽에서 몰래 몰래 반짝이면서/ 살금살금 흘러가는 실개천을 보고 있어요 스턴트맨이 TV 화면 꼭대기 옥상에서 춤추며 떨어진다 요란한 전기기타 배경음악, 네오 리얼리즘, 누벨바그, 스파게티 웨스턴, 거칠고 고단한 황야의 폭력성, 있는 그대로는 늘 잔인하다 스턴트맨은 배우가 아니다 얼굴이 더러운 **바운티 헌터 개기름 땀 줄줄 흐르는 이마가 클로즈업된다 *2019년도..

2022.05.09

|詩| 관련업소

사랑은 치명적인 축복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빛, 처절한 빛, 원초적인 빛, 말의 매직, 불투명한 말투, 엔진이 쉭 소리를 낸다 관련업소 가는 골목길에 떨어지는 빗방울 후드를 쓴 사람이 무어라 속삭인다 반짝이는 구슬, 수없이 부딪치며 떨어지는 구슬 문이 달칵 닫힌다 미안합니다 지금이 처음입니다* 본능의 저주가 영원히 달콤해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지진이 일어난다 땅이 커다랗게 갈라져요 잿빛이 먹빛으로 오버랩 되는 지금 중 시퍼런 청춘을 매장하는 삽질 당신이 첫 삽을 뜨기 전, 첫 삽도 뜨기 전에 먼 동이 트인다 먹먹한 외침, 짧게 들이쉬는 숨 소리, 생존자의 호흡이 떨린다 빛이 빛을 열렬히 약탈한다 *이민진 원작 애플 드라마 마지막 회, 주인공 선자가 시장에서 김치를 처음 팔며 하는..

2022.05.01

|詩| 온건파 칠면조

발목을 삐었어 토실한 닭다리 빛 솔개 날개 빛 활짝 펴 목이 뒤로 젖혀진 자목련 자세 서재 밖 뒤뜰 실개천 건너 하늘 건너 유유히 비상하는 칠면조 보잉 747 번쩍번쩍 빛나는 칠면조 얼굴 빛 시시각각 변하네 칠면조 짙푸른 날갯짓 어느덧 멈추려나 강경파 강경파 칠면조 드라이한 잔디를 활보한다 절름절름 왼발 오른발 소절을 가로지르는 이음줄 안단테 칸타빌레 느리게 노래하듯 부드럽게 응 응 맞아 맞아 우렁차게 노래하듯 소리치듯 시작 노트: 얼마 전부터 다리를 저는 칠면조 한 마리가가 간간 혼자서 풀밭을 걸어다니는 것을 본다. 열댓 명이 넘는 대가족과 동떨어져 혼자 행동한다. 절름거리며 풀밭을 거침없이 보행한다. 나는 그를 강경파라 부른다. 한 번은 그가 풀밭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더니 솔개처럼 보잉 747..

2022.04.24

|詩| 칠면조, 개나리를 쪼아먹다

4월 바람 찬 바람 휘말리는 무지갯빛 당신 네모난 입이다 세모꼴 쐐기 모양 샛노란 잔디 북북 할퀴는 단단한 발톱 열 개 잔디 잔디의 강행 강행처리 뭉툭한 大氣 기하학 大氣 타원형 바람 쪼아 먹는 일곱가지 색 당신 불거지는 젖줄이다 4월 바람 찬 바람 속 흥건한 눈물 샛노란 피 무지갯빛 빛 빛 나리 나리 개나리 칠면 칠면 칠면조 한 몸 한 몸 나는 한 몸 시작 노트: 앞마당에서 칠면조 여럿이 개나리를 콕콕 쪼아먹는 광경을 보았다. 얼른 사진을 찍었지.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하는 동요가 들리는 듯! 구글 검색을 했더니 글쎄, 개나리 꽃을 샐러드에 넣어 먹을 수 있는데 맛이 좀 쓰대. 닭이나 칠면조나 발가락이 네 개인줄 알고 있지만 왠지 네 개가 아닌 다섯 개라고 우기고 싶은 생각이야. 이제 ..

2022.04.21

|詩| 틀린 음정

4월이 폭주한다 브릉 부르릉 샛노란 개나리 벚꽃 자목련서껀 서슴없이 합세하는 화살 다발 다발 소스라치게 날아가는 4월 사랑 피아노 페달을 심하게 밟지 않아도 괜찮아 페달에서 발을 아주 떼면 안돼 머리가 하얗게 센 온음표를 일부러 빠듯하게 연주하면 곡이 이상해지지 머리칼이 새까만 4분 음표들이 보무 당당하게 걸어가는 순간이다 군대식 질서 강약 중강약 척척 강약 중강약 착착 4월이 내뿜는 소리를 파스텔컬러로 그리려 해요 무관심과 애절함에 흠뻑 젖는 연주 태도 때문에 점수가 좀 깎인다 해도 *“틀린 음정을 치는 일이 곡을 틀리게 해석하는 짓보다 낫다…” 하며 소나타 형식을 난데없이 무시하고 얼떨결에 우수수 떨어지는 벚꽃 사랑이다 실성하는 자유를 박탈당한 entity답게 실성하는 자유를 완전 박탈당한 entit..

2022.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