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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대형 TV

*”배우세요? 아니 스턴트맨이야. 스턴트맨이시군요. 그게 훨씬 나아요. 왜 훨씬 나아? 배우들은 가짜이니까요”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해/ 당신은 알고 있어/ 거칠고 고단한 황야의 폭력성을/ 사나운 독수리의 날갯짓을 듣지 못하는 우리의 섬세함을/ 古典이 어이없이 무너지고 있어요/ 예쁜 말은 다 가짜예요/ 라이락 향기가 나를 에워싸네요/ 뒷마당 저쪽에서 몰래 몰래 반짝이면서/ 살금살금 흘러가는 실개천을 보고 있어요 스턴트맨이 TV 화면 꼭대기 옥상에서 춤추며 떨어진다 요란한 전기기타 배경음악, 네오 리얼리즘, 누벨바그, 스파게티 웨스턴, 거칠고 고단한 황야의 폭력성, 있는 그대로는 늘 잔인하다 스턴트맨은 배우가 아니다 얼굴이 더러운 **바운티 헌터 개기름 땀 줄줄 흐르는 이마가 클로즈업된다 *2019년도..

2022.05.09

|詩| 관련업소

사랑은 치명적인 축복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빛, 처절한 빛, 원초적인 빛, 말의 매직, 불투명한 말투, 엔진이 쉭 소리를 낸다 관련업소 가는 골목길에 떨어지는 빗방울 후드를 쓴 사람이 무어라 속삭인다 반짝이는 구슬, 수없이 부딪치며 떨어지는 구슬 문이 달칵 닫힌다 미안합니다 지금이 처음입니다* 본능의 저주가 영원히 달콤해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지진이 일어난다 땅이 커다랗게 갈라져요 잿빛이 먹빛으로 오버랩 되는 지금 중 시퍼런 청춘을 매장하는 삽질 당신이 첫 삽을 뜨기 전, 첫 삽도 뜨기 전에 먼 동이 트인다 먹먹한 외침, 짧게 들이쉬는 숨 소리, 생존자의 호흡이 떨린다 빛이 빛을 열렬히 약탈한다 *이민진 원작 애플 드라마 마지막 회, 주인공 선자가 시장에서 김치를 처음 팔며 하는..

2022.05.01

|詩| 온건파 칠면조

발목을 삐었어 토실한 닭다리 빛 솔개 날개 빛 활짝 펴 목이 뒤로 젖혀진 자목련 자세 서재 밖 뒤뜰 실개천 건너 하늘 건너 유유히 비상하는 칠면조 보잉 747 번쩍번쩍 빛나는 칠면조 얼굴 빛 시시각각 변하네 칠면조 짙푸른 날갯짓 어느덧 멈추려나 강경파 강경파 칠면조 드라이한 잔디를 활보한다 절름절름 왼발 오른발 소절을 가로지르는 이음줄 안단테 칸타빌레 느리게 노래하듯 부드럽게 응 응 맞아 맞아 우렁차게 노래하듯 소리치듯 시작 노트: 얼마 전부터 다리를 저는 칠면조 한 마리가가 간간 혼자서 풀밭을 걸어다니는 것을 본다. 열댓 명이 넘는 대가족과 동떨어져 혼자 행동한다. 절름거리며 풀밭을 거침없이 보행한다. 나는 그를 강경파라 부른다. 한 번은 그가 풀밭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더니 솔개처럼 보잉 747..

2022.04.24

|詩| 칠면조, 개나리를 쪼아먹다

4월 바람 찬 바람 휘말리는 무지갯빛 당신 네모난 입이다 세모꼴 쐐기 모양 샛노란 잔디 북북 할퀴는 단단한 발톱 열 개 잔디 잔디의 강행 강행처리 뭉툭한 大氣 기하학 大氣 타원형 바람 쪼아 먹는 일곱가지 색 당신 불거지는 젖줄이다 4월 바람 찬 바람 속 흥건한 눈물 샛노란 피 무지갯빛 빛 빛 나리 나리 개나리 칠면 칠면 칠면조 한 몸 한 몸 나는 한 몸 시작 노트: 앞마당에서 칠면조 여럿이 개나리를 콕콕 쪼아먹는 광경을 보았다. 얼른 사진을 찍었지.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하는 동요가 들리는 듯! 구글 검색을 했더니 글쎄, 개나리 꽃을 샐러드에 넣어 먹을 수 있는데 맛이 좀 쓰대. 닭이나 칠면조나 발가락이 네 개인줄 알고 있지만 왠지 네 개가 아닌 다섯 개라고 우기고 싶은 생각이야. 이제 ..

2022.04.21

|詩| 틀린 음정

4월이 폭주한다 브릉 부르릉 샛노란 개나리 벚꽃 자목련서껀 서슴없이 합세하는 화살 다발 다발 소스라치게 날아가는 4월 사랑 피아노 페달을 심하게 밟지 않아도 괜찮아 페달에서 발을 아주 떼면 안돼 머리가 하얗게 센 온음표를 일부러 빠듯하게 연주하면 곡이 이상해지지 머리칼이 새까만 4분 음표들이 보무 당당하게 걸어가는 순간이다 군대식 질서 강약 중강약 척척 강약 중강약 착착 4월이 내뿜는 소리를 파스텔컬러로 그리려 해요 무관심과 애절함에 흠뻑 젖는 연주 태도 때문에 점수가 좀 깎인다 해도 *“틀린 음정을 치는 일이 곡을 틀리게 해석하는 짓보다 낫다…” 하며 소나타 형식을 난데없이 무시하고 얼떨결에 우수수 떨어지는 벚꽃 사랑이다 실성하는 자유를 박탈당한 entity답게 실성하는 자유를 완전 박탈당한 entit..

2022.04.16

|詩| 자목련의 첫외출

바람의 습도를 감지하는 자목련, 어깨를 움츠린다 어두운 붉은색 꽃잎 짙푸른 초록빛 품에 휘말려요 바람결 연신 흔들리는 자목련 당신은 도시의 불온한 습기를 한껏 들이마실 것이다 간간 크게 놀라기도 하고 낯선 사람들 말투를 흉내 낼 것이다 자목련의 첫 번째 외출 어두운 붉은색 꽃잎 짙푸른 초록빛 품으로 산산이 흩어지네 시작 노트: 2021년 봄 즈음해서 하루가 멀다하고 보고 또 보는 차고 옆 굴뚝 앞 자목련이다. 키가 내 두배 정도. 자목련의 엉성한 가지는 있는둥 마는둥 자목련이 가지채 세차게 흔들린다. 꽃의 흔들림은 순전히 바람 때문이다. 모든 꽃들이 그러하듯 자목련은 바람에 합세한다. © 서 량 2021.05.07

2022.04.16

|詩| 자목련과 종달새

자주색으로 터지는 꽃잎 열림이 하늘을 부유하는 깃털 떨림이 몸서리치게 유한하다 당신의 결을 매만지는 나의 앎 그 절실한 앎도 유한해 자목련이 종달새와 덩달아 지지배배 하늘을 날아다니네 그들은 몰라요 꿈에도 알지 못해 오늘같이 하늘이 소리 없이 젖혀지는 동안 당신이 좀처럼 서글퍼 하지 않는다는 걸 시작노트: 집 차고 옆 굴뚝 앞에 핀 자목련 꽃을 사진 찍었다. 몇몇은 꽃잎을 활짝 뒤로 젖힌 자세다. 자목련과 종달새의 삶이 유한하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친다. 엊그제 한 블로거의 詩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종달새는 울지 않는다. 종달새는 다만 노래할 뿐. 자목련이 종달새와 함께 새처럼 훨훨 날아간다. ©서 량 2021.04.15

2022.04.15

|詩| 헷갈리기라도 한 듯이 마치도

바람 소리 먼 천둥 소리 종달새 소리 베토벤 열정 소나타 3악장의 6도 화음 재즈 비트에 깔리는 당김음 병원 여직원들의 요란한 웃음 소리 뎅뎅 울리는 괘종시계 30 중반 내 엄마 목소리 이러이러한 소리들의 마법(魔法)을 내가 정말! 서글픈 유행가 가사 서정주 식의 어법(語法) 마크 트웨인의 막말 요한복음 1장 1절 햄릿의 존재론적 독백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라는 말 양자택일 하라는 말 우렁차게 울리는 새벽 염불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당신이나 나나 참! 시작 노트: 나이 들수록 소리에 민감해진다. 말의 의미, 말속에 숨어있는 사람 마음 같은 것에 예민해지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니, 하는 요한의 말을 생각한다. 말이 곧 신이라는 말을 신봉한다. 과연 소리가 마음의 메신저일..

2022.03.30

|詩| 날달걀을 위한 여린 생각

--- *거리의 악사여, 세상은 넓고 당신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 브르통, 수포 쓰린 속에 달걀을 깨어 넣는다 달걀이 내 몸 안에 들어온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잠식당한다 **생물속생설 안에 안주하는 나 홀씨가 발아하는 굉장한 이벤트/ 보송보송한 민들레 홀씨/ 야외천막 곡마단/ 객석을 향하여 한 발 다가서는 아코디언 주자/ 관객 한두 명이 눈 여겨 보는 악사의 대담한 복장/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두터운 천막 안 달걀 껍데기를 콕콕 쪼아 먹는 갈가마귀 한 마리 고개를 수평으로 꺾어 하늘을 보네 내 물컹한 소화기 한 모퉁이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 들리네 *앙드레 브르통, 필립 수포 공저, 자동기법으로 쓴 시집 (1921) 중에서 의 한 구절 **모든 생물은 이미 존재하는 다른 생물, 즉 어버이에..

2022.03.17

|詩| 웃통을 벗어 던지고

겨울과 봄 사이에 증세가 악화됐어 웃통을 훌렁 벗은 사내가 야구공을 치는 자세로 치는 징, 징 소리 살갗에 샛노란 버터를 처바른 커다란 달 덩어리가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있구나 큰 테러 사건이 터지기 전, 한참 전부터 시간과 시간 사이에 찡겨서 빼도 박도 못하면서 울리는 징, 징 소리가 마냥 울린다 고막이 아파요 꿈의 안과 밖 사이를 과도기 현상이라 부른대 겨우내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며 오늘과 내일 사이를 파고드는 환상, 수상한 환상만 쫓다가 봄기운 본능으로 험악한, 아주 험악한 자세를 취하는 겁니다 열 올라 내 생각이 틀림이 없단 말이야 살갗을 홀랑 태우는 여름 땡볕의 위력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관계로 날이 가면 갈수록 증상이 도지고 있다네 생각과 생각 사이를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시작 노트: 오..

2022.03.06